한국일보

타마라 드 렘피카 @ 드영 뮤지엄

2025-01-08 (수) 12:00:00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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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낯선 이름의 이 화가는 100년 전 유럽과 미국의 화단을 매혹했던 경이로운 여성이다.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이자 파격의 아이콘이며 사교계의 총아이기도 했던 그녀는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사랑한 자유영혼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인상주의가 도도하던 당대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았고, 큐비즘과 아르데코가 뒤섞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컬렉터들을 열광시켰다.

샌프란시스코 드영(De Young)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타마라 드 렘피카(Tamara de Lempicka)’는 오랜만에 만난 멋진 전시다. 냉정과 열정, 이성과 감정, 지각과 관능이 공존하는 작품들 앞에서 전율과 흥분이 번갈아 찾아왔다.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작품을 했을까, 이 작가를 어떻게 지금껏 모르고 있었을까, 그동안 그녀의 이름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여러 의문이 꼬리를 물 정도로 작품이 현대적이고 뇌쇄적이었다. (작품이미지는 드영 웹사이트 www.famsf.org 혹은 구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에서 열린 최초의 렘피카 회고전은 2024-25년의 가장 중요한 미술행사의 하나로 꼽아도 좋을 듯하다. 널찍한 공간에 100여점이 충실하고 훌륭하게 전시돼있는데,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 한산하리란 예상과 달리 사진 찍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관람객이 붐볐다. 여유가 된다면 2월9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를 절대 놓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붓을 든 남작부인’이라 불렸던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는 선각자이며 해방자였고, 1920년대를 관통한 독립적이고 쾌락주의적 여성 ‘플래퍼’(flapper)의 화신 같은 인물이었다. 폴란드의 상류가정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러시아에 머물던 16세 때 변호사 테데우스 렘피키를 만나 결혼했으며,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부부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피카소,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등과 함께 아방가르드의 주역으로 활동했고, 파격적인 작품들로 파문을 일으키며 화단의 프리마돈나로 군림했다.

당시 많은 인상파화가들이 함께하자고 했지만 인상주의의 불분명한 선과 형태를 싫어했던 그녀는 단순하고 선명한 신고전주의, 원뿔과 기둥으로 형태를 표현하는 큐비즘, 우아하면서도 시크한 아르데코 스타일을 고수하며 상류계 인사들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남자화가들이 여성을 순종적인 성적 대상으로 묘사할 때 렘피카는 여성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센슈얼한 그림을 선보였다. 곡선보다는 직선, 추상보다 기하학적 형태, 차갑고 매끈한 금속적인 느낌의 초상들은 묘하게 무심한 귀족적 권태를 띠면서 로봇과 테크노 시대를 예견한 미래적 느낌을 준다.

“수백 개의 그림들 중에서도 내 그림은 금방 알아볼 것이다. 나는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다.”라고 했던 그녀의 말대로 렘피카의 그림은 강렬한 이미지로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던 렘피카는 첫 남편과 이혼 후 합스부르크 제국의 부호 라울 쿠프너 남작과 재혼했고, 2차 대전이 터지자 1940년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했다. 미국에서도 여러번 개인전을 열었지만 화단이 차츰 추상주의로 바뀌자 활동을 중단했고, 1972년 파리에서 회고전이 열려 재조명되기도 했지만 과거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1980년 사후에 할리웃 유명인사들이 컬트작품처럼 소장하면서 골수팬들이 생겨났다. 잭 니콜슨과 바브라 스트라이전드가 열혈 컬렉터로 유명하고, 마도나는 뾰족 브라패션과 뮤직비디오를 통해 렘피카의 에로티시즘을 재현했다. 그림 속 인물들이 입은 독특하게 각진 옷들은 샤넬의 칼 라거펠트, 루이비통의 마크 제이콥스 등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도 영감을 선사했다.

한편 전시가 열리고 있는 ‘드영 뮤지엄’은 그 자체로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샌프란시스코미술관(FAMSF) 산하 2개 미술관 중 하나로 1895년 신문재벌(M. H. de Young)의 이름을 따서 문을 연 이 곳은 17세기 이후 유럽과 미국,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의 미술품 1만여 점이 전시되어있다.

FAMSF 산하의 또 다른 미술관 ‘리전 오브 아너(Legion of Honor)’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궁전을 본 따 만든 곳으로 고대유물부터 중세와 근대 유럽의 회화, 조각품들이 전시돼있다. 정문 앞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서있는 이곳은 특히 약 80점의 로댕 작품이 소장된 전용관이 유명하다.

두 미술관은 모두 대형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운 자연이 압도적이다. 드영이 위치한 골든게이트 파크는 뉴욕 센트럴 파크보다 크고 여러 건축물과 가든이 조성돼있어서 다 돌아보기 벅찰 정도이고, 리전 오브 아너가 있는 링컨 파크는 해송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바닷가공원이며 하이킹 명소로 유명하다. 두 미술관은 차로 5분 거리이고 한 입장권(20달러)으로 모두 둘러볼 수 있다. 특별전은 예외인데 현재 드영에서는 타마라 드 렘피카 전, 리전에서는 메리 카사트 전을 각각 35달러에 예약해야 한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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