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언론 매체에 실린 얘기다.
지금은 28세, 거의 29세에 가깝다. 내 나이 다섯 살, 내 누이 아홉 살이 되자 어머니는 우리 자매를 소아정신과 의사 오피스로 데리고 갔다. 평생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어머니가 혹시 자신의 우울증이 자식들에게 유전이 될까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진료결과 누이는 괜찮고 나는 우울증 발생 위험이 매우 높다는 소견이 나왔다. 의사는 미래의 우울증 방지 목적으로 소량의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심리상담 조언을 주었다. 그래서 아홉 살까지 매일 약을 먹고 한 달에 한 번 심리상담사와 만났다.
11세에 어머니가 세상 떠나자 외할머니가 나를 맡아 키웠다. 다른 소아정신과 의사의 진료도 첫 번째와 같았다. 몇 년 후에 의사가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 복용하던 약물과 상담도 중지했다. 약 끊은 뒤 2년 동안은 아무 일 없다가 어느 날부터 아침에 눈뜨면 항상 기분이 어둡고, 침울하고 몸도 쉽게 피곤함을 느꼈다. 매사에 관심과 의욕도 많이 떨어졌지만 그런대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1학년 말 세상 모든 일이 지루하고 귀찮아 살고 싶지 않았다. 처음 자살 시도를 했다. 그 후 몇 번의 자살 시도로 자주 병원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다량의 항 우울제 복용과 성직자의 상담을 받고 있는 중이다. 약물보다 성직자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며 산다. 하지만 우울한 기분과 무언가 하고 싶은 의욕은 좋아진 느낌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죄짓고 싶지 않아 자살 생각은 안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앞 환자는 심한 우울병 케이스다. 120년 전 정신분석의사 프로이트는 어릴 때 어머니나 혹은 돌봐주는 사람과의 불안정한 애정형성(애착)이 나중에 우울병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반면 1960대-70년대의 긍정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을 우울병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부정적 기대를 벗어나 긍정적 마음가짐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지행동치료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신과의사 아론 벡은 우울병을 부정적 인식패턴의 부산물이라 단정했다. 3개념 모두 장단점이 있어 아직까지 우울병의 확실한 원인은 모른다.
우울병치료 중에 아론 백의 인지행동 접근 방법이 지금도 대부분의 정신질환 치료에 적용되고
있다. 부정적 안경을 쓰고 자신과 세상,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인지왜곡 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인지왜곡을 조기에 알아차려(Catch) 검토한 후(Check) 바로 잡으라(Change)는 3C원칙을 방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인지행동치료는 현재 상황과 사고(Thought) 과정에 너무 치중하여 인간의 보편적 마음 상태인 감정을 등한시 한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정신과 진단에 피검사나 영상촬영 검사가 없기에 전적으로 증상의 분석, 개인과 가족의 병력,
주위환경 등에 의존하여 진단할 수밖에 없다. 이점을 고려하여 잘 정리해 놓은 것이 최신판인 정신질환 진단과 통계 열람(DSM-5)이다. 그럼에도 복잡한 환자 케이스는 담당 정신과 의사의 개인적 경험과 해석에 따라 진단과 치료가 달라진다. 앞 환자의 경우는 우울병 양상 중의 하나인 멜랑코리아에 속한다. 멜랑코리아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가 처음으로 기술한 역사 깊은 병이다. 당시에 우리 몸속의 검은 담즙이 많으면 사람이 슬프고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했다. 후에 어둡고 우울한 기분을 뜻하는 우울병으로 진화되었다. 지금은 멜랑코리아를 심한 우울병으로 심리적 요인보다 생리적 현상이 중요한 내인성 우울병으로 이해하고 있다.
멜랑코리아의 대표적 증상은 허무하고 공허한 우울감이 아침에 심하고, 오후가 되면 조금씩 나아진다. 특히 즐거움과 흥미가 떨어져 무슨 일에도 기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어떻게 하루를 버틸까 하는 걱정에 휩싸여 있다, 비현실적인 과도한, 모든 문제가 자기 때문이라는 부적절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생물학적 요인이 많은 멜랑코리아는 약물치료에 잘 반응하는 우울병이다. 내 임상경험은 상당
수의 멜랑코리아 환자가 우울 증상이 놀랍게 좋아지면서 가끔 조중 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경우 조증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소량의 기분조절 약물이나 항정신성 약물을 첨가했다. 이런 임상경험은 멜랑코리아가 주요 우울병 진단 보다는 조울병 진단 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한두 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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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