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의 창] 몰래 녹음이 일상이 된 세상

2024-09-27 (금) 김후곤 변호사ㆍ전 서울고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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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에는 ‘억울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많은 공적 인물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주인은 국민이고 검사, 사법경찰, 변호사 등은 그들의 대리인일 뿐이다.

검찰이라는 글자는 ‘檢’(검)과 ‘察’(찰), 경찰이라는 글자는 ‘警’(경)과 ‘察’로 이뤄져 있다. ‘檢’은 ‘검사하다, 조사하다’라는 의미이고, ‘警’은 ‘경계하다, 타이르다’는 의미를 지닌다. 중요한 점은 검찰과 경찰에 공통으로 쓰이는 ‘察’은 ‘살피다, 조사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살피고 조사하는 것이 본연의 업무인데, 1%도 안 되는 정치적 사건 등을 제외하면 ‘살피고, 조사하는 일’이 민생사건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문제의 출발은 소위 ‘수사권 조정’이라는 두 차례의 파괴적 입법 이후부터다. 민생을 위한 입법이 아니라 ‘미운 검찰 죽이기’라는 정치적 의도로 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검찰과 경찰은 ‘(미운) 정치적 사건에 모든 역량을 투입’함으로써 수사 인력의 적정 배분에 실패하고 있다.

민생사건의 처리과정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검찰, 경찰의 판사화’로 인해 ‘살피고 조사하는 기능’은 변호인의 역할로 변질되고 있다. 수사기관은 직접 나서서 해야 할 증거 수집 활동을 당사자에게 전가하고 팔짱을 끼고 있는 판이다. 국회가 법을 엉터리로 만들었다지만, 행정부도 부화뇌동하고 있다. 검사도 판사고, 경찰도 판사고, 판사는 오히려 검·경의 역할을 하려는 형국이다.

더 나아가 기형적인 수사권 조정 입법을 통해 검찰, 경찰, 공수처가 민생은 제쳐놓고 경쟁하고 있다. 중복수사의 폐해는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국민은 어떻게든 내가 낸 세금으로 누가 수사하든 ‘범죄 없는 세상’이 만들어지길 바라는데, ‘빛나는 수사’는 서로 하려고 하고, ‘재미없는 수사’는 서로 ‘핑퐁’하면서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

검찰 직접 수사 대상이 되는 범죄에 대해 검찰에 고소장을 내면 직접 수사는 하지 않고, 경찰로 이첩 종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검찰은 ‘형사부에는 초임 검사를 포함해 2, 3명이 경찰 송치 사건을 처리하느라 1인당 100건이 넘는 미제가 쌓여 있어 직접 수사가 불가능하다’라고 답한다. 중앙지검만 따져 봐도 정치적 사건을 처리하는 한 부서에 검사만 10명 이상이 배치돼 있는데, 형사부는 3, 4명에 불과하다. 사건 당사자 처지에서 보면 기가 찰 일이다.

경찰에 고소장을 내면 더 가관이다. 계좌 추적이나 통화 내역 조회 또는 IP 추적만 해도 쉽게 범행을 밝힐 수 있는 내용인데 몇개월이 지나도 수사 진척이 없다. 답답한 변호사는 담당 수사관을 찾아가 수사 요망 사항을 전달하지만 ‘그동안 검찰이 처리해 오던 소위 재산범죄, 명예훼손 범죄 등은 법리도 어렵고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수사권 조정 이후 수사 인력도 늘지 않고, 수사 잘하는 사람들은 다른 부서로 가 버렸다. 변호사가 법리나 증거를 잘 정리해 내 주면 원하는 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답만 돌아온다.

이쯤 되면 형사사법시스템을 지탱하던 공소(公訴)제도는 무너지고 사소(私訴)제도가 사실상 들어선 것이다. 변호사들은 제도화되지 않은 탐정과 협력해 증거를 찾고, 사건 당사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만들기 위해 상대방과의 대화를 녹음하는 일은 예사가 됐다. 그로 인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현실이 됐고, 사건 처리는 한없이 늦어지며,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위정자는 아무도 없는 게 서글픈 현실이다.

<김후곤 변호사ㆍ전 서울고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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