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엔비디아와 닷컴 버블의 추억

2024-09-10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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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말 미국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닷컴 버블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원래 70년대 미 국방부가 군사 목적으로 개발한 인터넷은 90년대 일반에 널리 퍼지면서 인류의 미래를 바꿀 획기적 발명품으로 주목받았고 이를 이용해 물건을 사고 파는 수많은 닷컴 업체가 쏟아져 나왔다.

이중에는 아마존 같이 실체가 있는 회사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수익이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낼 전망이 없는 펫츠 닷컴이나 코즈모 닷컴, 이토이즈 닷컴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1997년 18달러에 상장한 아마존은 닷컴 붐이 절정이던 2000년 초반 50배까지 올랐지만 버블이 터지면서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아마존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고 한때 100배 이상 폭등했던 수많은 닷컴 기업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부지기수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라디오가 대세였고 이 추세에 불을 지른 사람은 데이빗 사노프였다. 1912년 4월 타이태닉호가 침몰하면서 라디오 구조 메시지를 보냈고 인근에 있던 카파티아호가 이를 듣고 달려가 수많은 생명을 건졌다. 당시 마르코니 전신사 뉴욕 매니저였던 그는 유족들이 사망자 신원 확인을 위해 통신사에 몰려들어 아우성을 치는 모습을 보고 라디오의 힘을 절감했다.


뒤에 RCA의 사장이 된 그는 1921년 헤비급 권투 시합을 생중계하는 등 라디오를 미국인의 안방에 확실히 심어놨고 1920년대 5달러이던 RCA 주가는 라디오 광풍에 힘입어 1929년 500달러까지 올랐으나 증시 버블이 터지면서 다시 5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올해와 작년 미국 주식 시장은 엔비디아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작년 한 해 동안 3배가 오른 이 주식은 올 들어서도 최근까지 다시 2배 넘게 올랐다. 올 3월 1일 이 주식의 시가 총액은 2조 달러를 넘어섰는데 1조에서 2조가 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6개월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보다 3배가 빨랐다. 6월에는 3조 달러를 돌파하면서 잠시 미국에서 가장 가치있는 기업이 됐다.

엔비디아(라틴어로 ‘질투’, ‘부러움’이라는 뜻)의 역사는 짧다. 1993년 대만 출신 엔지니어로 LSI 로직에 근무하던 젠슨 황이 선 마이크로시스템에서 일하던 동료 2명과 불과 4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시작했다. 그가 이 회사를 만든 것은 컴퓨터 업종 중 가장 인기있는 것은 비디오 게임이고 이를 위해서는 그래픽스 가속 칩이 필요하다는데 착안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것이 인공 지능이 작동하는데 필수적일 것이라는 점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이 회사도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칩 개발에 뛰어든 회사는 70여개에 달했는데 다 망하고 살아남은 것은 엔비디아와 AMD에 흡수된 ATI 둘 뿐이다. 일본 비디오 게임 업체 세가가 엔비디아 제품 성능에 실망해 계약을 종료하면서도 미래를 보고 500만 달러를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이 회사도 문을 닫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후로도 한 동안 어려움이 계속돼 “문 닫기 한 달 전”이 이 회사의 구호가 됐다.

그러나 1999년 주식을 상장하고 Ge포스256 칩 개발에 성공하면서 2007년에는 포브스지로부터 ‘올해의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대 들어 AI 붐이 불고 AI 작동에 필수적인 칩을 사실상 엔비디아가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가는 폭등을 거듭해왔다.

그런 엔비디아 주식이 지난 1주일 동안 15% 가까이 폭락했다. 이 주식은 3일 하루에만 9.5% 하락하며 시가 총액 2,800억 달러가 증발했는데 이는 미 역사상 최대 규모다.이는 경기 둔화와 AI 거품론, 거기다 연방 법무부의 반독점 조사까지 겹치면서 매물이 쏟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엔비디아의 경우 이런 정도 하락은 흔한 일이다. 올 들어서만 시가 총액 1,900억 달러 이상 사라진 경우가 8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예사롭게 볼 일도 아니다. 지금 소위 ‘황야의 7인’(Magnificent Seven)으로 불리는 대장주가 S&P 500 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2%에 달한다. 이들은 모두 하이텍 기업으로 AI 붐을 타고 지난 수년간 폭등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9년 전 이들 비중은 9%에 불과했다.

거기다 미국인들의 금융 자산중 주식 소유 비율은 42%로 닷컴 버블 때보다 높고 기관 투자가들의 낙관론은 4년래 최고다. 일부 기술주 편중과 지나친 낙관론, 객관적 기준에 따른 과대 평가, 거기다 주가 하락이 자주 일어나는 9월이라는 계절적 요인까지 조심해야 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닷컴이나 인터넷, 라디오가 인간의 삶을 바꿔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관련 주식들이 모두 오른 것은 아니다. AI 붐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나 지금 증시를 낙관만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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