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로이터=사진제공]
동료를 아낀 손흥민(32)에게 돌아온 건 끔찍한 인종차별이었다.
손흥민은 지난해 10월 크리스탈 팰리스전에서 벤탄쿠르가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떨쳐내고 8개월 만에 복귀하자 가장 크게 기뻐한 이 중 하나였다. 벤탄쿠르는 지난해 2월 레스터시티전에서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으로 시즌아웃된 바 있다. 당시 선제골을 넣고도 부상으로 교체되는 아픔을 겪었던 벤탄쿠르다.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던 손흥민은 벤탄쿠르의 아픔을 공감했다. 팰리스 전에서 골을 넣으며 2-1 승리를 이끌었던 손흥민은 이날 자신의 골보다 벤탄쿠르의 복귀를 더 기뻐했다. 경기 후 토트넘 선수들이 팬들에게 인사할 때 벤탄쿠르를 관중석 앞으로 데리고 나가 팬들 앞에 서게 했고 팬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어 손흥민은 벤탄쿠르를 어린아이처럼 껴안으며 기쁨을 나타냈다.
당시 손흥민은 구단을 통해 "벤탄쿠르의 복귀는 내게 미소를 만들어 준다"라며 "그는 엄청난 선수다. 벤탄쿠루의 복귀는 우리가 뛰어난 새 선수를 영입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기뻐했다. 이어 "토트넘 선수들 모두가 벤탄쿠르의 복귀를 기다렸다. 벤탄쿠르가 아까 경기장에 들어설 때 감정이 올라왔다. 그는 내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제가 지난 시즌 부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벤탄쿠르가 언제나 날 웃게 만들어줬다. 늘 응원해줬다"며 "건강해진 벤탄쿠르의 복귀는 정말 환상적이다. 팀에 기폭제가 돼 줄 것이다"라고 거듭 좋아했다.
하지만 이런 손흥민에게 벤탄쿠르는 인종차별을 저질렀다. 영국 '디 애슬레틱'은 15일(한국시간) "벤탄쿠르가 토트넘 동료 손흥민에게 질 나쁜 농담 후 사과했다"고 전했다.
매체에 따르면 벤탄쿠르는 우루과이 방송 프로그램 '포르 라 카미세' 촬영 도중 손흥민을 향해 인종차별적 농담을 했다. 어린아이를 안고 인터뷰에 참여한 벤탄쿠르는 해당 방송 진행자가 '손흥민의 유니폼을 구해달라'고 요청하자 "손흥민의 사촌 유니폼을 가져다줘도 모른다. 손흥민이나 사촌이나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자 진행자는 "아 그렇구나"라고 맞장구쳤다.
이후 벤탄쿠르의 발언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동양인이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 인종차별적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난 속에 사태의 벤탄쿠르는 심각성을 깨닫고 곧장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과문을 올렸다. 그는 "쏘니(손흥민 애칭)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 내가 한 말은 '나쁜 농담'이었다"며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알지? 절대 무시하거나 상처를 주려고 한 말은 아니다. 사랑한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팬들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종차별적 발언은 범죄 행위다'라며 비판이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손흥민과 벤탄쿠르는 평소 토트넘에서 깊은 우정을 보였기에 팬들의 실망은 더욱 크다.
벤탄쿠르가 저지른 과격한 행동도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달 15일 맨체스터 시티와 리그 34라운드에서 후반 초반 교체되자 불만을 품은 벤탄쿠르는 벤치로 들어와 의자에 사정없이 발길질하며 분풀이했다. 당시 옆에 앉아있던 브리얀 힐이 당황하는 모습이 중계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손흥민은 EPL 진출 후 여러 차례 인종차별을 겪어왔다. 지난해 11월 손흥민에게 인종차별 행위를 한 크리스탈 팰리스의 40대 팬은 3년간 축구장 출입 금지와 벌금형 중징계를 받은 바 있다.
해당 관중의 이름은 영국인 로버트 갈랜드다. 지난해 5월 토트넘과 크리스탈 팰리스 경기에서 손흥민이 교체돼 벤치로 걸어갈 때 갈랜드가 손흥민을 향해 양손으로 눈을 찢는 행위를 했다. 이는 동양인이 눈이 작다고 조롱하는 대표적인 인종차별 행위다. 손흥민은 외면하지 않고 팰리스 관중들을 응시했고 경기 후 구단 관계자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알리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갈랜드의 인종차별 행동은 중계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공유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토트넘은 물론 상대팀 팰리스도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당시 토트넘은 "인종차별은 혐오적인 일이고 사회에서나 축구 경기, 팀에서 용납될 수 없다. 런던 경찰 및 크리스탈 팰리스와 협력해 해당 인물을 찾고 있다"고 강조했다. 팰리스도 "경찰에 증거자료를 공유했고, 신원이 확인되면 경기장 출입금지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우리 팀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고 전했다.
당시 시민 사회도 목소리를 냈다. 축구 인권단체 '킥 잇 아웃'은 "손흥민이 끔찍한 인종차별을 당했다. 선수의 행복은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축구 관계자들은 선수들이 경기장을 떠날 때 (관중석과) 가까운 쪽으로 가는 게 선수들에게 차별적인 행동에 노출될 위험이 있는지, 특히 경기 중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법원은 갈랜드의 인종차별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형과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하지만 영국 검찰은 이 같은 처벌이 약하다며 경기장 출입금지 명령을 추가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갈랜드는 3년 동안 축구 경기 관람을 할 수 없게 됐다. 뿐만 아니라 갈랜드가 해외에서 경기를 보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제 경기 기간에는 여권을 압수하는 처분을 내렸다.
프리미어리그 사무국도 당시 해당 판결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놨다. 사무국은 "손흥민에게 인종차별 행위를 했던 개인에게 내려진 경기 관람 금지 명령을 환영한다"며 "인종차별을 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중요하다. 잘못하면 징계가 따른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담겼다"고 전했다. 이어 "인종차별은 축구뿐 아니라 우리 사회 어디서든 설 자리가 없다. 만약 여러분이 인종차별 행위를 본다면 즉시 신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흥민을 향한 인종차별은 처음이 아니었다. 같은 런던 지역을 연고로하는 웨스트햄, 첼시 등과 악연이 깊다. 지난 2018년 10월 한 웨스트햄 팬이 온라인상에 "손흥민은 (불법복제) DVD를 파는가"라고 인종차별적 글을 썼다. 또 지난 2월엔 손흥민이 웨스트햄을 상대로 골을 넣고 난 후 한 팬이 SNS에 인종차별적 댓글을 달았다.
2022년 8월에는 첼시와 토트넘의 경기 도중 한 첼시 팬이 코너킥을 차기 위해 걸어가는 손흥민을 향해 눈을 찢는 행위를 했다. 논란이 되자 첼시 구단은 해당 남성 팬을 홈 경기장 출입 금지 징계를 내렸다. 런던 법원은 벌금 726파운드(약 115만원)와 축구장 3년 입장 금지 처분을 내렸다.
팬뿐만이 아니다. 축구 전문가 마틴 타일러(77)도 손흥민을 향한 인종차별 발언으로 뭇매를 맞은 바 있다. 타일러는 1990년부터 30여 년간 스카이 스포츠에서 해설을 해 온 베테랑이다. 그는 지난 2월 토트넘과 리버풀의 경기 해설 도중 손흥민이 상대 선수를 수비하는 과정에서 손을 사용하다가 경고를 받자 "마샬 아츠(무술의 일종)를 하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동양인이 무술을 잘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서양인들의 흔한 인종 차별적 발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자 팬들은 SNS를 통해 '만약 영국 선수가 파울을 했다면 그런 단어를 사용했겠나' '불필요한 발언이었다'고 비난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스카이스포츠는 "타일러는 자신의 표현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했다. 악의는 없었다"고 입장을 전했다.
<스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