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반성의 기미

2024-06-13 (목)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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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한쪽이 부정을 저지르면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참 힘들다. 소위 ‘피해자’ 쪽에서는 그때부터 상대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상대가 결백을 주장할 때마다 ‘아니, 거짓말! 여태까지도 날 속였잖아’하는 생각으로 괴로워한다. ‘미안하다. 한때의 실수였다’는 상대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스스로 의심의 덫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혼외 관계를 가졌던 당사자는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으로 마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순진한 피해자’는 배반감, 실패감, 우울감, 무너진 자존감 등으로 순간순간 괴롭다”는 게 상담실에서 만난 케이스 당사자들의 하소연이다.

A부인이 상담실을 찾은 건 이런 괴로움이 자살을 떠올릴 만큼 깊어졌을 때였다. 부부상담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남편은 부인의 끝없이 이어지는 의심 질문들이 고문처럼 느껴진다고 하였다. “진짜 이젠 다 끝난 관계입니다. 와이프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구요, 날마다 미안하다,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 수백번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얼굴을 마주치기만 하면 예전 일을 가지고 또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나에게 말하는 동안 A부인은 팔짱을 낀 채 증오심 가득한 표정으로 남편을 쏘아보더니 이렇게 내뱉었다. “거짓말쟁이! 진심으로 말해봐, 진심으로!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냐고! 반성할 맘이 있다는걸 보여줘!”

마음은 안 보인다. 안 보이는 마음을 보이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가 반성문이다. 나도 객기 가득한 시절에 제도와 권위를 거슬러 가려다가 반성문을 종종 썼었다. 그때 뭐라고 썼었는지, 진심으로 반성을 했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한국 뉴스에서 검찰이 중형을 구형하면서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하거나 ‘피고인이 깊이 반성하는 점을 참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심리학을 공부한 나는 속으로 궁금해 한다. 반성하는지 아닌지 그분들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범인이 양손에 수갑을 찬 채 사건 현장에서 범행 재연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때도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뻔뻔스럽게 그 장면을 재연해냈다’고 설명하는 것을 듣는다. 나는 스크린 샷으로 범인의 표정을 캡처한 다음 천천히 다시 보면서 심리학이 연구결과로 내놓은 표정이론을 대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달디 단 수박을 크게 한입 베어 물 때의 표정과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이 사용하는 얼굴 근육은 비슷하게 움직인다는 것.


반성이란 내면 성찰이라서 남이 진짜, 가짜를 판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진심인지 아닌지, 반성하는 척만 하는지 알게 뭐람. ‘난 정말 죄가 없어요!’하고 우기는 사람을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중형을 선고하지는 않을까? 내 분야도 아닌데 슬그머니 걱정도 된다. 상담실에는 가끔 법원에 제출할 반성문을 대신 써달라는 내담자들이 온다. 내 책임 한도를 넘는 일이라 대개는 ‘노우’ 하지만, 때로는 딱한 사정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피해자와 합의할 때도 반성하는 기색을 충분히 보여야 한다. 마약 복용으로 집행유예를 받았거나, 음주운전 케이스도 있다. 학교에서 말썽을 부린 경우에도 반성문을 제출해야 한다. 요즘은 ‘반성문 대행업체’를 찾아가 돈을 내고 대신 반성문을 받아오는데 변명으로 들릴 문장을 피해서 ‘진심’이 보여지도록 전문 대필을 한다고 한다. 챗GPT에게 물어서 초본을 작성하기도 하지만 그런 문장을 하도 많이 접해본 전문가들은 ‘진심’ 여부를 판단하는데 나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저러나 ‘진심’보다 ‘의도’가 더 중해진 세상이다. 차라리 마음이 안보여서 천만 다행인건 아닐까? www.kaykimcounseling.com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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