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준을 장악하려는 트럼프

2024-05-15 (수) 캐서린 램펠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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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대통령후보지명이 확실시되는 도널드 트럼프는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을 무력화하고 싶어한다. 인플레이션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중앙은행인 연준의 무력화는 최고등급의 화재경보에 해당한다.

전임 대통령과 그의 측근 참모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유해한 경제정책안을 다투어 내놓는다. 트럼프는 재집권할 경우 단계적 이민축소를 통해 노동력 공급을 줄일 계획이다. (여기에는 노동허가승인을 받은 합법이민도 포함된다.) 그는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고,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상품에 예외없이 10%의 보편관세를 부과하길 원한다. 여기에 보태 일부 중국산 물품에는 100% 관세를 추가할 계획이다. 그가 대통령 재임시 부과한 관세의 비용이 제품 가격인상을 통해 고스란히 미국인 소비자들에게 전가됐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걸까?

월스트리트 저널의 단독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이미 연준의 정치적 독립성을 무너뜨릴 청사진을 작성했다. 연준을 장악하기 위해 그가 마련한 몇몇 방안 중에는 대통령에게 연준의장을 해고할 권한을 부여하거나 대통령이 직접 금리결정에 개입하는 안이 포함되어있다.


그렇다면 연준의 정치적 독립성은 왜 중요한가?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 특히 재선에 도전하는 대통령은 단기적인 경기 개선 효과를 내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화 공급량을 조절하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금리를 인하해 대출경비를 줄이면 시중에 돈이 풀리면서 소비자들의 씀씀이가 늘어난다. 이 경우 소비자들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롭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정치인들은 실질적인 경기부양 필요성에 상관없이 통화 공급량을 확대해 경제에 단기적인 에너지원을 제공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현명한 듯 보이는 단기적 조치가 장기적으로 늘 유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미 잘 돌아가는 경제에 통화 공급을 확대할 경우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게 된다. 반대로, 경기가 과열되면 중앙은행은 대단히 인기 없는 단기조치를 취해야 한다. 예컨대 더욱 고통스런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 줄줄이 오르는 물가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

그렇다고 중앙은행이 늘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거나 외부의 감독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 연준의 이사가 되려면 대통령의 지명과 연방 상원의 인준 절차를 거쳐야 하며, 재직 중에는 관련법에 따라 정기적으로 의회에 출석해 증언해야 한다.

그러나 연준 이사들을 의회로 불러 어려운 질문에 답하게 만드는 것과 이들을 선거판의 득표기로 활용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연준 의장과 이사들은 파면이나 해임의 두려움 없이 필요할 경우 언제건 인기 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독립성 보장이 없다면 연준은 물가안정과 완전고용이라는 두 가지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

과거 수년에 걸쳐 이루어진 여러 연구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강할수록 인플레이션 통제가 한결 수월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플레이션에 찌든 아르헨티나와 유로시대 이전의 이탈리아가 이를 입증하는 대표적 본보기에 해당한다. 이들 외에 터키는 현재 연율 68.5%의 인플레에 시달리고 있고 베네수엘라는 지난해 거의 200%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관한 대중의 인식도 대단히 중요하다. 중앙은행이 물가를 안정시키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면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고 만다. 연준이 중앙정부의 눈치를 살핀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물가인상 조짐이 보이면 기업들은 중앙은행이 금리인상과 통화축소 등의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둘러 제품가격을 인상한다. 공급업자들의 가격인상에 대비한 선제적 조치인 셈이다. 중앙은행이 기대 인플레이션을 지켜낼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단기 가격 쇼크는 재빠르게 장기 인플레로 전환된다.


트럼프가 연준의 독립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 재임 당시 트럼프는 그에게 충성하는 ‘정치 공작원’을 중앙은행 이사로 임명하려 시도했다. 다행히 당시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그의 시도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또한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율을 띄우고 개인적인 재정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금리인하를 요구하며 연준을 압박했다. (막대한 빚을 짊어진 개인과 기업에 금리인하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시절에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얼까?

그 즈음에 연준은 이미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의 결실로 ‘독립적 기관’이라는 확고한 평판을 구축한 상태였다. 게다가 트럼프가 임명한 연준의 멤버들조차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하려는 그의 시도에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트럼프가 권좌에 있는 동안 미국 경제는 팬데믹 이후의 경제봉쇄 해제처럼 인플레이션 쓰나미를 유발하는 강력한 충격을 받지 않았다.

지금의 경제적 환경은 다르다. 불가피하거나 잘못된 정책 선택 등의 다양한 이유로 미국은 최근 한 세대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물가고는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을 현재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재점화를 막을 수 있었던 핵심 이유는 연준이 단행한 연이은 금리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대중이 장기적 물가안정에 대한 연준의 확고한 의지를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차기 대통령이 연준의 독립성과 평판을 훼손한다면 이번에 우리가 누린 행운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캐서린 램펠은 주로 공공정책, 이민과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는 워싱턴포스트지의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이다. 자료에 기반한 저널리즘을 강조하는 램펠은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바 있다.

<캐서린 램펠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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