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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돼지와 추락한 독수리

2024-05-14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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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 위기로 타격을 받지 않은 나라는 없겠지만 가장 심한 충격을 받은 나라는 그리스일 것이다. 제대로 된 산업이라고는 관광업밖에 없으면서 소득 대체율 90%에 달하는 연금 등 유럽 수준으로도 후한 복지 프로그램으로 만성 적자에 시달려온 그리스는 장부 실사 결과 그나마 2009년 실제 재정 적자는 공식 발표의 2배에 이르고 실제 국채 규모는 공식 수치보다 10%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구제 금융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스 정부는 12 차례나 세금을 올리고 복지 예산을 줄여야 했지만 이는 광범위한 폭동과 시위를 불러 일으켜 나라 전체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만다. 정부는 2010년, 2012년, 2015년 세차례나 IMF등으로 부터 구제 금융을 받았으나 서방 선진국 중 처음으로 IMF 빚을 제때 갚지 못한 나라가 됐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럽 남부의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도 사정이 비슷했다.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산업은 별로 없으면서 방만한 사회 복지 지출로 재정 상태가 열악했다. 사람들은 이들 나라의 영어 앞글자를 따 이들을 ‘PIGS’라 부르며 조롱했다. 이들 경제가 회복하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서양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두고 “돼지가 날 때”(when pigs fly)라는 표현까지 있다.


그런데 이 기적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 선두에 선 것은 유럽 최고의 문제아 그리스다.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미 2년 전 OECD 각국 중 경제 지표가 가장 우수한 나라로 그리스를 주목한 바 있다. 이 잡지는 “10년 전 국가 부채로 조롱받던 그리스가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 성적 1위를 차지했다”며 “중도 우파 정부는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치고도 재집권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그리스 경제 부활의 핵심 인물은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다. 그는 작년 총선에서 급진 좌파연합을 2배 이상 따돌리며 압승을 거뒀다. 그리스 유권자들은 신자유주의 규탄과 포퓰리즘 공약 등 낡은 선동으로 국민을 속이고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좌파 세력에 철퇴를 날렸다.

우파 정부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감세와 공기업 민영화 등 비즈니스 친화적 정책을 펴자 투자가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테네 동쪽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짓고 있는 데이터 센터로 2025년까지 10억 유로를 투입, 3개의 데이터 센터를 지을 예정이다.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에는 제약 회사 파이저가 6억5,000만 유로를 들여 연구 단지를 지었다. 모두 세계 기업인의 그리스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그리스 주식은 지난 1년간 40% 넘게 올랐다.

날고 있는 것은 그리스만이 아니다. 올 1분기 유럽 연합의 평균 성장률은 0.5%지만 그리스와 스페인 2.4%, 포르투갈 1.4%, 이탈리아 0.6%로 모두 평균을 웃돌고 있다. 반면 한 때 ‘유럽 경제의 기관차’라 불리던 독수리 독일은 0.2% 감소했다.

한 때 조롱거리였던 유럽 남부 국가가 이처럼 날게 된 것은 모두 그리스처럼 감세와 노동 시장 유연화 등 시장 친화적 정책을 펴고 과감한 경제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코로나가 끝나면서 관광업이 살아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이들 남부 유럽 국가들은 관광업이 전체 GDP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포르투갈의 경우 작년 외국인 관광객이 1,800만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으며 이는 코로나 전보다 19%가 늘어난 것이다.

반면 탈원전을 한다며 에너지를 대부분 러시아에 의존하고 중국 시장 공략을 최고 목표로 삼았던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 경기 침체로 고전하고 있다. 독일 분데스 방크는 올 1/4분기와 2/4분기 독일 경제가 연속 수축해 불황에 진입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유럽 산업과 서비스 동향을 보여주는 PMI 지수도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호조, 독일과 프랑스는 둔화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보험회사인 코파스 보고서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유럽 경제 성장의 25~50%는 ‘PIGS’로 불리던 4개국의 약진 덕으로 분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남부 유럽 각국이 고통스런 개혁을 단행하는 동안 독일은 숙제를 게을리 한 학생처럼 놀고 있었다며 한 때 이들의 교사였던 독일이 이제는 이들로부터 배워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편하고 잘 나가면 게을러지고 먹을 것이 없어 생명이 위태로워지면 죽기 살기로 애쓰기 마련이다. 한 때 잘 나가던 독일이 골골하고 ‘남부 유럽 돼지’로 조롱받던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가 하늘을 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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