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크라이나의 희망, 미국의 희망

2024-04-30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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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0년간 일어난 일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을 들라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가 첫 손가락으로 꼽힐 것이다. 1987년 6월 12일 레이건 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 “고르바초프여, 이 벽을 허무시오”라고 외쳤을 때 이 일이 살아 생전 일어나리라고 믿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워드 베이커 비서실장 등은 이 문구가 소련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다며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레이건의 고집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불과 2년 뒤 이 벽은 기적적으로 평화롭게 무너졌고 이와 함께 냉전 체제는 공산주의 몰락과 자유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열렸다는 환상이 깨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방치할 경우 ‘힘으로 국경을 변경하지 못한다’는 선례가 깨지면서 세계 평화는 물거품이 될 것이 자명했고 이에 따라 미국 주도로 다국적군이 결성됐다. 이들은 ‘사막의 폭풍’이란 이름의 공격 작전을 펼쳐 불과 한 달여 만에 이라크 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병력은 다국적군 95만, 이라크 군 100만으로 비슷했지만 전사자는 다국적군 292명, 이라크 최대 5만, 부상자 비율도 1만3천대 최대 30만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런 압도적인 승리로 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로 자리를 굳혔지만 이것이 훗날 독이 돼 돌아오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손 한번 휘두르면 바그다드로 진격해 후세인을 체포하고 항구적인 중동 평화와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시 대통령이던 아버지 부시는 숙적 시아파와 순니파가 사담의 힘에 눌려 겨우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데 힘의 공백이 발생할 경우 이라크는 내전 상태에 빠져 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이 감당할 수 없다는 브렌트 스코우크래프트 보좌관 등의 말을 듣고 멈췄다. 중국 속담에 ‘현자는 멈출 줄 아는 사람’이란 말이 있는데 아버지 부시는 드문 현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네오콘으로 불리는 미 공화당 보수 강경파에게 이는 두고두고 불만 사항으로 남았고 9/11 사태가 터지자 이들은 이를 기화로 이라크의 대량살상 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걸고 침공을 준비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딕 체이니 부통령으로 원래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아들 부시를 부추겨 쳐들어가게 했다.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 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이 제거되자 예상대로 순니파와 시아파의 내전이 격화되고 그 와중에 ISIS라는 테러 단체까지 발호하는 등 무정부 상태에 빠져 들었다. 이 와중에 미군 4천500여명이 사망하고 4만7,000여명이 부상당했다. 2003년부터 2011년 철군할 때까지 미군이 쏟아부은 돈은 1조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며 참전 미군 중 상당수가 전쟁 스트레스로 마약 중독자나 정신 이상자로 전락했다. 이런 희생을 치르고도 원래 전쟁 목적이던 대량 살상 무기는 끝내 찾지 못했다.

이 전쟁은 전통적으로 안보를 강점으로 삼던 공화당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를 산산조각 내게 하는 계기가 됐다. ‘다른 나라야 어떻게 되던 미국은 신경쓸 필요 없다’는 ‘미국 제일주의’가 나온 것은 이 때 이후고 그 물결을 탄 것이 루저 도널드의 핵심 지지층인 MAGA 세력이다. 최근 도널드가 한 나토 동맹국이라도 방위비를 제대로 내지 않으면 러시아가 침략해도 상관없다는 발언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이런 신고립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우크라이나다. 1주일이면 항복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3년째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영웅적인 항쟁을 벌이고 있는 이 나라는 미국의 지원이 늦어지면서 러시아가 열 발 쏘면 한 발 겨우 대응할 정도로 무기가 바닥났으며 방공망도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 상황에서 최근 600억 달러 지원안이 통과돼 겨우 한숨 돌리게 됐다.

이 돈 중 절반은 미군의 최신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되고 그렇게 해서 남은 구식 무기를 우크라이나에게 보내는 것으로 사실은 미군 전력 강화 예산이나 마찬가지다. 미 GDP의 0.3%에 불과한 이 돈을 보내는 것이 이토록 힘들다는 것은 미 고립주의의 입김이 얼마나 거센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어쨌든 지원안은 통과됐고 러시아의 푸틴과 지원에 극렬 반대하던 MAGA는 패배를 맛봤다. 이 안이 부결됐더라면 우크라이나는 무너졌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럽과 아시아에 이어 미국의 안보도 흔들렸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미국에도 희망의 불씨는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준 지난 한 주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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