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진보주의자들 ‘트럼피즘’ 조심스레 대해야

2024-04-08 (월)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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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C 뉴스가 로나 맥대니얼을 정치 분석가로 채용했다가 나흘만에 퇴출하자 언론계 전체에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맥대니얼을 둘러싼 아우성은 2024 대선 캠페인에서 반복적으로 대두될 더 큰 이슈를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느냐는 문제다. 요점을 간추리자면, 맥대니얼은 공화당전국위원회(RNC)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2020년 11월, 공화당 지역구 관리들에게 대통령선거결과를 인증하지 말라고 종용했고, TV 인터뷰를 통해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았다는 허위주장을 전개했다.

어디로 보나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나 여러 경로를 통해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트럼프의 ‘큰 거짓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보니 사안의 중요성에 둔감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 간단히 정리해보자.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중단시키려 시도한 대통령이다. 그는 대선결과 인증을 막기 위해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을 선동했고, 자신의 지시를 거부한 부통령과 공화당 의원들을 겁박했다. 그리곤 하원 공화당 의원의 과반수를 움직여 전국 50개주와 DC가 공인하고 수십여 차례의 법원 판결을 통해 확증된 2020 대선결과 인증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했다. 한마디로 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미국의 헌정질서를 유린하려 시도한 유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따로 있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분의 1 가량이 2020 대선이 불공정하고 자유롭지 못한 선거였다고 믿는다. 미국의 성인 인구 가운데 8,500만 명 이상이 트럼프의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할까? 이런 잘못된 믿음을 갖도록 유도한 사람들에게는 또 어떻게 다가서야할까? 이들 전부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 모조리 내치고 외면해야 하나? 이런 사람들이 NBC 뉴스에 출연해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 있도록 허용해선 안 되는 걸까? 짐작컨대 NBC 뉴스 중역진이 맥대니얼을 채용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그것이 지상파 방송에서 미국인 8,500만 명의 견해를 대변하는 합리적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맥대니얼 파문과 관련해 NBC 뉴스가 처한 딜레마를 충분히 이해한다. 맥대니얼은 보수주의자나 공화당원이 아닌 반민주주의자였다. 그녀는 이 나라의 헌법적 토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의 속성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정치인들도 미국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솔직히 말해 많은 공화당 지도자들은 지금 비겁한 게임을 하고 있다. 그들은 트럼프의 거짓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공화당의지지 기반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그들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 자살행위’라는 사실에 집중할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트럼프에게 반대했던 공화당 의원들과 선출직 관리들에게는 하나같이 ‘전직’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러나 최악의 극단적 트럼피즘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맥대니얼도 그중 하나다. 그녀는 최근 NBC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이 미국의 합법적 대통령이라고 확언했다. 이같은 정상으로의 회귀를 격려하고 고무해야 할까, 아니면 한때 음모론을 지지했던 자들을 영원히 벌주어야 마땅할까?

자유로운 민주국가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철두철미하게 적대적인 태도와 견해를 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상대로 진보적 수단을 사용하고픈 유혹을 피해야 한다. 필자는 트럼프에게 제기된 일부 소송에 강한 우려를 갖고 있다. 기술적으로 적법한 케이스일지 몰라도 이들 중 일부는 그 당시에는 고발조차 되지 않았던 수년 전의 불법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가 지금처럼 논란의 한복판에 선 정치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혐의들로 고발을 당했을까?

이제까지 그를 완전히 내치려는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88건의 중범혐의와 엘리트 언론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에 앞서고 있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그들을 무시하는 고학력 엘리트들이 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생각에 잔뜩 열을 받은 상태다. 이런 판국에 대도시의 변호사 그룹이 트럼프의 대통령 출마 자격을 박탈할 기막힌 방법을 제시한다면 그의 지지자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필자가 새로 발간한 “혁명의 시대”에서 지적했듯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 포퓰리스트 우파의 반감은 우리의 정치적 미래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대한 위협을 가한다. “그러나 우파 또한 동일한 극단주의에 빠져있다. 많은 좌파인사들은 진보주의 규칙과 절차를 없애길 원한다… 그들은 ‘잘못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또한 그들은 쿼터와 법령을 이용해 인종적 평등을 달성하길 원한다. 교육적, 혹은 예술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교육과 예술을 사용하고 싶어한다. 난민신청자의 권리 등 진보적 아이디어가 지니는 이론상의 도덕적 우월성에 매료된 좌파는 이 추상적 개념을 사회에 강제로 떠안기려든다. 그러나 절충을 모르는 좌파 혹은 반동적인 우파의 하향식 혁명은 종종 개선이 아닌 혼란을 초래한다.”

자유주의와 외국인 혐오를 특징으로 하는 트럼프의 우익 포퓰리즘은 미국을 어둡고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간다. 하지만 사법적 메커니즘에 의지해 트럼프를 정치판에서 밀어내고 그의 지지자들을 ‘왕따’시키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우익 포퓰리즘을 물리치는 방법이 아니다. 그보다는 트럼프의 우군들과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진영에 상관없이 미국인들의 관심사를 제대로 다루고 있으며, 정치적 전장에서 트럼프와 맞서 그를 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 우익 포퓰리즘을 이기는 정당한 방법이다.

예일대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파리드 자카리아 박사는 국제정치외교 전문가로 워싱턴포스트의 유명 칼럼니스트이자 CNN의 정치외교분석 진행자다. 국제정세와 외교부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석가이자 석학으로 불린다.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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