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노인의 낙서

2024-02-23 (금) 박석규 은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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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목사가 요양시설에 있는 노인이 남긴 낙서라면서 ‘어느 노인의 낙서장’을 보내왔다.

“돈 있다 위세 부리지 말고, 공부 많이 했다고 잘난 척하지 말고, 건강하다고 자랑치 말고, 뽐내지 마소. 다아- 소용없더이다. 나이 들고 병들어 누우니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너나없이 남의 손 빌려 하루하루 살아가더이다. 그래도 살아있어 남의 손에 끼니를 이어가며 똥오줌도 남의 손에 맡겨야하는구려. 당당하던 그 기세 그 모습이 허망하고 허망하구려. 내 형제 내 식구 자식만 최고인양 남을 업신여기지 마시구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식구도 아닌 남들이 어쩌면 이토록 고맙게 해주는지…”

읽고 나니 숙연해진다.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이다. 누가 늙고 싶어 늙고 병들고 싶어 병들었을까. 세월가면 늙어가는 게 당연하고 늙어지면 병드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늙어있을까? 자화상을 들여다본다. 젊어서는 어떻게 성공하는가,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생각했지 어떻게 늙어야하는지를 생각하지 못한 부끄러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늙어서 존경받는 사람이다. 추하게 손가락질 받으며 늙지 말아야겠다. 주름살과 함께 품위가 갖추어지면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고 빅토르 유고가 오래전에 가르쳐주었다.


속절없이 늙어가더라도 세월을 견디며 영혼의 등대 찾아가야지…. 감사와 소망과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감사와 소망과 사랑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청춘의 우정보다 황혼의 우정이 아름답다. 노년생활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 이웃과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는 삶인 것이 분명하다.

늙어간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란다. 걱정하려면 두 가지만 걱정하라.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 아프면 걱정하지 말고 아프면 두 가지만 걱정하라. 나을 병인가? 안 나을 병인가? 나을 병이면 걱정하지 말고 안 나을 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하라.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이면 걱정하지 말라. 죽는 것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란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에게 주신 오늘 하루는 축복이요, 최고의 선물이다.

<박석규 은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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