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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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도 영화도 구름인양

2024-02-09 (금)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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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 있을 때 창(唱)을 배운 선후배 3명이 의기투합해서 한때 소리꾼 행세를 한 적이 있었다. 노래패 이름도 만들어 연말이면 동료들 행사장에 부지런히 불려 다니기도 했으나 재주가 출중하지 못한데다 뒷심도 달려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때 내가 좋아했던 노래 중의 하나가 연속극 ‘장녹수’의 주제가였다.

권세를 쫓던 한 여인의 슬픈 종말을 그린 노래였는데 그 노래를 부르기 전만 해도 나는 장희빈과 장녹수를 간혹 헷갈리고 있었다. 성씨가 같은 장시(張氏)인데다 아름다운 미모로 왕의 후궁으로 들어가 온갖 세도를 부린 점이 같고 마지막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 점이 너무 비슷한 두 여인이어서 그랬다.

장녹수는 1,400년대의 10대 조선왕 연산군의 후궁이었고 장희빈은 1,600년대 19대 숙종의 후궁이었다. 장녹수는 노비로 태어나 어쩌다 연산군의 총애로 후궁이 되어 지나친 사욕을 탐했고 장희빈은 부유한 집안의 딸로 궁궐에 입궁했으나 정치적 암투와 권모술수로 부침을 거듭한 여인들이었다.


조선실록은 두 여인 가운데서도 장녹수의 악행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숙용 장씨’로 기록된 장녹수는 궁궐에 들어오기 전 이미 다른 노비와 결혼해 아들까지 낳았으나 얼굴이 동안이고 노래와 춤이 특출한 기생이었다. 연산은 이런 장녹수에 반해 그를 입궐시켜 많은 재물을 집으로 보내준 끝에 후궁으로 삼았다.

장녹수는 왕의 환심을 받고나자 친정식구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는 것은 물론 나라의 상벌 업무를 전횡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어린 연산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고 아이 다루듯 욕설과 조롱을 일삼기도 했으며 어쩌다 연산이 눈길을 주는 듯한 궁녀가 있으면 서슴지 않고 참형을 했다고 한다.

연산군 자신도 조선조 최악의 폭군이었지만 장녹수의 이런 악행은 그들의 비극적인 최후를 자초했다. 두 사람이 다투어 폭정과 부패로 일관하는 동안 생업을 잃은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로 치솟았고 당시 떠돌아다니다가 굶어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숭례문과 노량진 사이에는 산더미처럼 쌓였었다고 전해진다.

1506년 마침내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 두 달 만에 숨졌으며 장녹수는 성난 군중 앞에 끌려 나가 36세의 젊은 나이에 비통한 종말을 맞고 말았다. 연산은 왜 이 포악한 여인을 내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200년 뒤 장희빈은 왜 장녹수에게서 교훈을 얻지 못했을까?

프랑스까지 갈 필요가 없다. 역사는 어디서나 인과응보의 법칙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한국은 지금 경제 파탄에다 전쟁위기설까지 겹쳐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거기에다 대통령 부인이 저지른 부정 부패사건을 둘러싸고 검찰 선후배 간에 추악한 권력투쟁까지 벌이고 있는 모습은 차마 목불인견이다.

노래패는 흩어졌으나 나는 오늘도 ‘장녹수’ 노래를 혼자 흥얼거린다. “가는 세월 바람타고 흘러가는 저 구름아, 수많은 사연 담아 가는 곳이 어디 메냐/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양 간 곳 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그렇다. 부귀도 영화도 한 순간 구름인양 흩어지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니….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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