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은 무대예술이고 시간과 공간의 예술이다. 무대라는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일어났다가 소멸하는 예술행위, 관객들은 단 한번밖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의 감동을 경험하기 위해 음악회, 오페라, 뮤지컬, 연극, 춤 공연장을 찾는다.
안타깝게도 남가주는 공연예술이 활발한 곳은 아니다. 클래식 콘서트는 잘 나가는 LA필하모닉 덕분에 상당히 수준이 높지만, 무대종합예술의 정점인 오페라 공연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가 한 시즌에 20여개,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가 9개 프로덕션을 올리며 연중 돌아가는 데 비해 LA오페라는 6개 공연에도 힘에 부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난주 발표한 다음 2024-25시즌 프로그램은 그나마 한개 더 줄어서 5개 오페라(나비부인, 로미오와 줄리엣, 코지 판 투테, 아이나다마르, 리골레토)가 전부다.
댄스 퍼포먼스는 더 열악하다. LA에는 뉴욕의 아메리칸 발레 씨어터(ABT)와 뉴욕시티발레(NYCB) 같은 굴지의 무용단이 없기 때문에 외부공연을 유치해야하는데, 가장 규모가 큰 뮤직센터의 글로리아 코프만 댄스 프로그램조차 한 시즌에 5개 정도밖에 초대하지 못하니 대작을 볼 기회는 일 년에 몇 차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춤 불모지’ LA에서 지금 메가 급의 댄스 퍼포먼스가 잇달아 열리는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매튜 본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2월25일까지 아만슨 극장), 스팅의 댄스뮤지컬 ‘병 속의 메시지’(2월6~11일 팬태지스 극장), 전설적인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2월8~11일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 이렇게 한꺼번에 메이저 댄스공연이 열리기는 처음인데다 모두 세계적인 화제작이며 미국 내 초연이라는 점에서 흥분과 기대가 한층 더 크다.
지난주 개막한 매튜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풍선처럼 부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수작이었다. 매튜 본(Matthew Bourne)이 누군가, 자신의 이름만으로 춤의 한 장르를 형성한 세계 최고인기의 안무가요, 예술성과 흥행성을 모두 잡은 전설적인 아티스트다.
근육질의 남자백조들을 등장시켜 충격을 선사한 ‘백조의 호수’부터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가위손’ ‘레드슈즈’ ‘신데렐라’ 등 누구나 아는 고전 레퍼토리를 대담하게 재해석하는 그는 평단과 관객의 총아요, 발표하는 작품마다 새로운 열병을 몰고 오는 마법사와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러브스토리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개작했다. 두 가문의 불화와 갈등은 옛날이야기, 무대는 어느 가까운 미래의 ‘베로나’ 청소년 정신병원이다. 흰 티셔츠와 바지, 흰 운동화를 신은 환자들, 바닥 천정 벽이 모두 차가운 흰색의 무대세트가 획일적이고 억압적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의료진이 주는 대로 약을 받아먹고 경비원의 규율과 통제 속에 살면서 동성애와 성추행과 성폭행을 일상적으로 겪는다. 경비원의 먹잇감인 줄리엣은 중간에 입소한 로미오와 처음 만난 순간 운명적 사랑을 느끼지만 이들의 사랑은 예정된 비극을 향해 치닫고, 총과 칼과 살인으로 대체된 새로운 시대의 비극이야기가 격정적인 춤으로 펼쳐진다.
매튜 본의 작품이 모두 그렇듯 안무가 정말 독창적이다. 청소년환자들의 로봇 군무도 대단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저항적인 몸짓, 특히 발코니 씬은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물불 안 가리는 첫사랑의 열정과 광기, 강렬하게 편곡된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 무대를 지배한다.
한편 가수 스팅(Sting)의 노래들을 사용한 댄스뮤지컬 ‘병속의 메시지’(Message in a Bottle)는 스토리라인은 있지만 그저 스팅의 음악과 신나는 춤만 즐겨도 되는 공연이다. 23명의 댄서들이 거의 날아다닐 듯 브레이크 댄스와 힙합, 모던 테크닉을 선보이며 뿜뿜 아드레날린을 내뿜는다. ‘네가 숨 쉴 때마다’(Every Breath You Take), ‘록샌’(Roxanne), ‘그녀는 모두 마술적이지’(Every Little Thing She Does is magic), ‘뉴욕의 영국인’(Englishman in New York), ‘내 마음의 모양’(Shape of My Heart) 등 주옥같은 스팅의 노래들이 춤과 함께 어우러지는 특별한 공연을 볼 수 있다.
가장 기대되는 공연은 ‘봄의 제전’(Rite of Spring)이다. 전설적인 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 1940-2009)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사용해 50년 전 안무한 이 작품은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춤이라기보다 광기어린 집단포효에 가까운 공연이다. 고대인들의 봄맞이 의식에서 희생제물이 되지 않으려는 처녀들의 생존투쟁이 처절하고 극적으로 펼쳐진다. 흙바닥 무대에서 피하고 도망가고 잡으러 다니는 무용수들은 시간이 갈수록 온몸과 옷이 흙으로 범벅이 되고, 보는 사람들까지 가슴이 뛰며 호흡이 가빠진다. 이 작품 만들 때 피나 바우쉬는 무용수들에게 “이제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춤을 추겠냐”고 물으며 절박한 동작을 끌어냈다고 한다.
이번 공연은 바우쉬의 부퍼탈 무용단이 아닌 아프리카 14개국에서 선발된 30여명 댄서들이 출연하는 새로운 프로덕션이다. 고대 인류의 발상지에서 나온 무용수들이 진짜 실감나는 공연을 펼칠 것으로 기대된다.
모든 공연예술을 즐기지만 그중에서도 춤 공연을 가장 좋아한다. 춤은 몸의 언어이기에 가장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춤추는 이의 감정이 전달된다. 춤은 거짓이 없고, 언제나 간절하다. 음악과 하나 되는 몸짓들에 때로 경이롭게, 때론 격정적으로, 때로는 감미롭게 젖어들면 고단한 일상의 끈에서 놓여나는 정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
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