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길고도 복잡한 팔레스타인 이야기

2024-02-06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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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로파는 티레 출신 페니키아 공주다. 어느 날 풀밭에서 꽃을 따고 있었는데 이 공주에 반한 제우스가 흰 소로 변해 다가왔다. 공주가 소 위에 올라타자 그대로 바다를 건너 크레테 섬에 도착했고 여기서 미노스를 낳았다.

미노스는 이곳 왕이 된 후 미로를 만들고 여기에 왕비 파시파에가 황소와 교접해 낳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뒀다. 그리고는 9년마다 아테네로 하여금 9명의 미소년과 미소녀를 제물로 바치게 했다. 그 중의 한명인 테세우스가 크레테의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괴물을 죽이고 미로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 모두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진실의 일면을 담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크레테는 유럽에서 첫번째로 미노아 문명이 꽃핀 곳이다. 이 문명이 페니키아를 비롯한 근동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유럽’이라는 이름도 에우로파에서 왔다. 크레테의 괴물을 아테네가 죽였다는 것은 후발주자였던 아테네의 미케네 문명이 선두주자 미노아를 제압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 때 잘 나가던 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 암흑기를 맞는다. 트로이에서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서 파괴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집트인들은 자기 나라를 쳐들어온 이들을 ‘펠레셋’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기원전 1175년 델타 전투에서 이집트의 람세스 3세에게 대패한 후 지금 중동 지역에 정착한다. 그곳 지명이 팔레스타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이곳에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땅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이 두 세력간에 오랜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구약에서 유명한 이야기인 삼손과 데릴라, 다윗과 골리앗, 사울의 몰락 등이 모두 ‘블레셋’이라고 불린 이들과 투쟁의 기록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 블레셋 족은 아쉬돗, 아쉬켈론, 가드, 에크론, 가자 등 다섯개 도시를 이루고 살았는데 이를 ‘펜타폴리스’(‘다섯개의 도시’라는 뜻)라 부른다. 이들의 존재는 고고학적 유물로도 증명되고 있다. 이들이 어디서 왔느냐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는데 2019년 아쉬켈론에서 발견된 유골 DNA 조사 결과 크레테인의 흔적이 발견됐다. 성경은 이들이 ‘카프토’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크레테일 것으로 추정해 왔다. 종교와 과학이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본 셈이다.

서로 앙숙이던 블레셋과 유대 민족은 이집트의 부추김을 받고 중동의 강자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에 저항했다 함께 망한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 멸망하고 블레셋족은 기원전 712년 이아마니가 반란을 일으켰다 역시 사르곤 2세에게 정복당한다. 이들은 다시 기원전 604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완전히 망하고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만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와는 거의 상관없는 아랍계 셈족이고 7세기 이후에는 회교를 받아들여 회교 문화권에 속해 있다.

자기 땅인 줄 알고 살던 이들 삶에 중대한 변화가 온 것은 제2차 대전 후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를 세우겠다고 이곳으로 몰려오면서다.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오리지널 팔레스타인 5개 도시의 하나였던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가 이스라엘 손안에 들어갔다.

이중 요르단 서쪽의 서안 지구는 헤브론과 베들레헴, 여리고가 있는 원 유대 왕국의 핵심 지역으로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성지와 마찬가지다. 헤브론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며 묘지를 사 자신과 아내, 그리고 그 후손인 이삭, 야곱과 그 아내의 시신이 묻힌 곳이고 다윗이 왕이 된 곳이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출생지이자 예수가 태어났다고 믿어지는 곳이며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의 교두보로 삼은 곳이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결코 다른 민족에게 넘겨줄 수 없다. 국제 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200개가 넘는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팔레스타인인 입장에서는 수천년 동안 살던 곳을 하루 아침에 다 빼앗기고 가자와 서안 지구로 밀려난 것도 억울한데 거기까지 먹겠다고 덤벼드는 이스라엘을 용서할 수 없다.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대로 2개의 국가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유일한 평화적 해법이라고 제시하고 있으나 이 두 민족 강경파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유대인 강경파는 가자와 서안 모두 이스라엘 땅이라고 외치고 팔레스타인 강경파는 이스라엘의 파멸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0월 7일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의 유대인 학살로 촉발된 이스라엘 가자 전쟁이 해를 넘겨 다섯 달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간의 길고도 복잡한 역사를 보면 기껏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일 것이 뻔한 휴전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언제나 이뤄질 지 하나님만 아실 것 같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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