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개 신발과 노숙자’

2024-01-29 (월)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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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맨해튼의 추위는 매섭다. 바둑판처럼 가로세로 곧게 난 길을 따라 빼곡히 늘어서있는 마천루들이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도시의 겨울은 덜 추울 것 같지만 오히려 빌딩 숲이 바람이 더 세게 불도록 하는 ‘덕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부드러운 융으로 안감을 댄 한국산 기모바지와 오리털 잠바로 단단히 몸을 감싸고 목둘레에는 양모 스카프까지 둘렀는데도 북극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완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얼굴의 윗부분은 털모자를 귀까지 내려쓰고 아랫부분은 마스크로 가렸으나 사정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눈동자가 시리다.

이 추위 속에서도 주인과 함께 아침 산책을 나선 강아지는 무엇이 그리 좋은 지 킁킁거리며 통당통당 가벼운 걸음으로 보도 위를 걷고 있다. 개의 몸통은 방한용 붉은 천으로 감싸고 있으나 네 발은 맨발이니 얼음판처럼 차가운 보도블록 위를 디딜 때마다 얼마나 발이 시릴 것인가. 사람들은 왜 개에게 옷은 입혀주면서 신발은 안 신겨주는지 모르겠다. 개 신발을 예쁘게 만들어서 팔면 장사가 잘 될 텐데….


그러고 보니 개 발 시린 것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개는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따듯하게 겨울을 나고 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길바닥에 나앉은 노숙자들은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야 한단 말인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오며 가며 수많은 노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기차역의 대합실이나 지하철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통로 구석진 곳이면 어디든지 골판지를 깔고 담요를 덮고 눕는다. 지하철 차 내에서 의자 한 칸을 통째로 차지하고 누워 자는 노숙자도 있다. 대부분은 나이 든 흑인들이지만 때로는 분명히 한국인으로 보이는 노숙자도 있어 더욱 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주민들의 연평균 소득이 40만 달러가 넘는다는 부자동네 맨해튼에서 통행인이 건네주는 몇 달러로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노숙자들을 보니 인생은 참으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쩌랴.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자립할 수 없는 늙고 병든 노숙자들을 이렇게 추운 거리에 방치하는 것은 문명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 같다. 동물사랑과 자연보호도 좋지만 노숙자들이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도록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노숙자 재활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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