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혜원변호사의 H법정스토리

2024-01-11 (목) 신혜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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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의 사랑

이혼으로 깨지는 부부보다 이혼으로 가다 심기일전 하여 다시 붙는 훈훈한 부부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김 씨 부부 사례입니다. 김씨 할머니는 85세 이십니다. 할머니가 소시적 참 예쁘셨는지,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5살 연하이십니다. 김씨 할머니, 하루는 구깃구깃한 영문 종이를 마켓 봉다리 속에 넣고 변호사를 찾아오셨습니다. ‘선상님, 이게 우리 영감이 내게 보낸 서류인데 이게 대체 뭐래는 거여유?’ 김치 국물이 묻어 있는 영문 서류를 받아 보니, 아뿔싸, 할아버지가 법원에 접수한 이혼 신청 소장이었습니다. 까맣게 그슬려 주글주글 해진 할머니 얼굴을 보니, 변호사, 순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할머니, 이건 할아버지가 접수한 이혼 소장이에요.’ 할머니, ‘워매 이를 어쩐댜, 아이구 이를 어쩐댜’를 염불하듯 반복하십니다.
할머니 말씀이, 최근 할아버지가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집에 귀가 시간이 늦길래, 하루는 할머니가 뒤따라 가보았더니, 공원에서 어떤 할머니하고 둘이 딱 붙어 앉아 그저 싱글벙글 너무 좋아하더라는 겁니다. 할머니, ‘에이 설마’ 하면서도 마음이 찝찝해 다음 날 다시 뒤따라가 보니, 또 그 할머니 옆에 붙어 앉아 둘이 어찌나 다정한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합니다. 할머니,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나가려는 할아버지를 붙잡아, ‘그 할매가 누구여?’ 다그치니, 할아버지 왈, ‘그려, 내 애인이여, 요즘에 그 사람 땜에 내 심장이 다시 뛰어. 가슴이 밤낮으로 둥당거린 다니께’ 했다는 군요. 자,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기왕 들킨 거 내 인생 살란다’ 하고 집을 나갔다는 것입니다.
할머니, 변호사 손을 부여잡으시며, ‘선상님, 나 80 넘어서 이혼당하면 죽어서 조상님 앞에 얼굴을 못 들어유’ 연거퍼 조상님 타령만 하십니다. ‘선상님, 나 이거 좀 무효로 해주쇼. 여기 오면 다 해준다 해서 내가 찾아 왔슈.’ 변호사,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자, 캘리포니아 가정법 에서는 이런 경우, 오로지 이혼을 신청한 신청인만이 이혼 신청을 취소, 기각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으며, 이 때 REQUEST FOR DISMISSAL이라는 서류를 법원에 접수해야 합니다.
그 날 이후, 할머니는 변호사 사무실로 매일 아침 출근을 하십니다. ‘선상님, 우리 영감이 취소 했씨유?’ ‘할머니, 아직 할아버지와 연락이 안되네요. 근데 그 큰 보따리는 뭐 에요?’ ‘아, 이거, 우리 영감 먹을 밑반찬하고 갈아 입을 내복이 여유. 집 나가믄 고생혀유.’ 변호사, 할 말을 잃습니다.
이렇게 할머니는 변호사 사무실과 할아버지가 있는 곳을 매일 보따리를 들고 한동안 출퇴근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찾아오셨네요. 할아버지 랑 나란히 함께요. ‘선상님, 우리 영감이 어제 밤에 집에 돌아왔씨유. 나랑 이혼 안 한 대유.’ 변호사는 할아버지가 싸인해 준 REQUEST FOR DISMISSAL 서류를 들고 법원으로 뛰어 달려갑니다.
며칠 후,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고 할머니가 또 보따리를 짊어지시고 들어오시네요. 변호사, 너무 놀라, ‘Oh My GOD’ 찾습니다. 근데, 할머니 그 보따리를 변호사 앞에 푸시더니, ‘아이구 선상님, 매일 얼마나 힘드슈, 밥도 제 때 못 먹구. 이거 우리 영감이 좋아하는 반찬들인데 선상님 생각이 나서…’ 변호사, 사무실에 퍼지는 반찬 냄새 속에 코 끝이 빨개지며, 또 다시 ‘Oh My GOD’.
자, 이번 겨울, 우리 김씨 할머니 일편단심 민들레 사랑이, 한 이불 속 옆 사람 돌 쳐다보듯 무심해진 많은 분들께 바이러스처럼 전염되길, 그래서 따뜻한 겨울 되시길 바래봅니다.

*위 내용은 Fiction(허구)이며 실제 사례의 이야기가 아님을 밝혀드립니다.

<신혜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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