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생각] ‘큰바위 얼굴’

2023-11-16 (목) 조광렬/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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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은 서재필(Philip Jaisohn)이 창립한 ’독립회‘가 서울 서대문구에 세운 ’독립문‘ 기공식 127년째 되는 날이다. “(전략)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중추원 고문관이 된 서재필은 30여인으로 더불어 독립회를 세우니(중략) 그는 자신의 이름을 고쳐 畢立堤仙(Philip Jaisohn의 한자표기)이라 하였다.

9월 6일에 미국 의사 ’필립제선‘이 약정하여, 제선으로 하여금 독립문을 맡아서 세우게 하니,(중략) 그해 11월 21일에 정초식을 거행하였다(하략.大韓季年史 上. 146쪽)
서재필은 최초의 한국계 미 시민권자, 최초의 한국계 미국의사다.

그는 독립회 고문재직시 배재학당 강사로 이승만의 스승이었고, 실로 한국 근대화운동과 신문화운동의 선구자로 미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은 이 땅의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큰바위 얼굴’이다.


나는 오늘, 미주동포의 한사람으로서, 그의 이름 뒤에 붙여진 다양한 타이틀과 이력이나 업적에 대한 소개는 모두 생략하고, 대신 그에 대해 쏟아낸 소인배들의 각종 비난과 부정적 평가 속에서 더욱 빛나는 그의 진면목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 외신(外臣)이라 칭하고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한 뒤에 고종 앞에서도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고 비난 - 미개한 조선의 신분제 타파, 인민 평등권 확립 등의 개혁 혁명에 실패한 역적(?)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후 그의 온가족을 몰살시킨 조선에 미국인 신분으로 돌아와서 미국식으로 인사를 한 것은 자연스런 태도요, 초심을 잃지 않은 애국적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하지않을까?

▲대한제국 정부에서 추방당하면서 그는 2만 4,400원이라는 거액의 ‘위약금’을 요구해 받아 출국했기에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 - 고용계약을 위반한 쪽은 정부였기에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더구나 훗날 3.1 운동 직후, 그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부인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7만 6,000달러를 전부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던 그를 생각하면 오히려 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 그의 헌신적 애국심과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이런 희생적 모습에 감동한 안창호는 이때부터 그를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에게는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거부하였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땅에 묻혔으며, 미국시민으로 살다가 죽었기에 국립묘지로 이장은 불가” 지적 - 그렇다면, 그가 건국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이승만에게 양보한 것도 같은 잣대로 죽은 사람에게 비난의 훈계를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 때문이었다. (중략) 그리스도는 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하기는 유대 사람이었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우리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바르고 깨끗한 길을 걸어갈 결심을 한 것도,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인생에게 전해준 그리스도의 뒤를 잇기로 맹세한 것도 이때였다. 이 종교적 영향은 나의 인생을 통하여 위대한 힘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한국을 위해 하늘이 예비해 놓은 선지자였다.

그는 광복 후, 미군정장관 하지(Hodge, G. 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다시 귀국하였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고 미 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가 6.25 동란시 암으로 투병 중 88세를 일기로 휴전을 못보고 1.4 후퇴 때 세상을 떠났다.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기자 김을한에게 한 말이다. 그 말이 지금 큰 울림으로 나의 귓전을 때리고 있다.

그로부터 다시 75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서재필 같은 ‘큰 바위’ 얼굴이 그립다.

<조광렬/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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