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 미국과 한국에서 ‘노인’이 이슈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정치인 고령화가 문제로 떠올랐고, 한국에서는 고령 유권자 폄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기대수명이 길어지면서 고령 인구가 늘다보니 ‘고령’이 자주 이슈가 된다.
한국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장이 ‘혁신적’ 발언으로 설화에 휩싸였다. 노인 유권자는 ‘미래가 짧은 분’, 1인 1표가 아니라 기대여명에 따라 비례적으로 투표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라는 내용이었다. 아들이 중학생 때 한 말이라며 청년좌담회에서 소개했는데, 한마디로 경솔하고 무책임했다. 이런 논리라면 재산에 따라, 학력에 따라 투표권을 달리하자는 주장이 나올 판이다. 청년층 투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취지였다 해도 ‘노인 비하’ ‘세대 간 편 가르기’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노인 폄하’ 설화는 과거에도 있었다. 중견 민주당 정치인이 “60대, 70대는 곧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 투표 안 해도 그만”이라고 했다가 된통 홍역을 치렀다. 젊은 표심 얻으려는 얄팍한 계산이 초래한 사고였다.
한국의 ‘노인 비하’ 논란이 스쳐 지나갈 문제라면 미국의 정치인 고령화는 변화가 쉽지 않은 사안이다. 60대, 70대는커녕 80대에도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우선 조 바이든 대통령이 80세이고, 온갖 소송/기소에도 불구하고 백악관 재탈환 의지 강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77세이다.
바이든은 대통령으로서 역대 최고령이다. 하지만 그가 부통령과 대통령 역임 전 36년 동안 몸담았던 연방상원으로 가면 특별히 고령이랄 것도 없다. 버니 샌더스(81), 미치 매코넬(81), 척 그래슬리(89), 다이앤 파인스타인(90) 등 고령의원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다. 웹사이트 538에 따르면 연방상원의 중간나이는 65.3세. 반면 미국민의 중간나이는 38.8세이다. 미국의 정치는 ‘미래가 짧은 분들’ 손에 과도하게 맡겨져 있다.
정치인 고령화를 바꾸기 어려운 것은 특히 연방상원의 경우 나이 제한도 임기 제한도 없기 때문이다. 다선일수록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 상원 시스템이다. 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이 막강할수록 연방정부 지원 확보가 쉬우니 주정부들도 고참 의원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유권자들 역시 현역을 선호하는 경향. 아는 이에게 믿음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22 중간선거에 출마했던 현역 상원의원들 전원이 승리했고, 주지사 선거에서는 현직 중 단 한명만 패배했다. 현역의 힘이 강하니 나이든 정치인들은 계속 당선되고 정계 고령화는 깊어 간다. 연륜에 따른 통찰력과 혜안 등 이들이 이바지하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고령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노쇠이다. 나이 100살에도 현역으로 일하는 의사가 있는 만큼 나이만을 기준으로 ‘너무 늙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식석상에서 넘어지고 말귀를 못 알아듣고 말이 헛나가서 인지능력과 신체기능의 쇠퇴가 의심된다면 정치인 본인이나 유권자들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노화’로 눈총을 받는 대표적 인사는 상원 최고령인 파인스타인이다. 단기 기억력 감퇴로 금방 브리핑 받고도 그 사실을 잊어 먹고, 맥락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지 여러 해다. 바이든 역시 툭하면 넘어지고 말실수가 잦아서 보좌관들이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치 매코넬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가 ‘노화’ 대열에 합류했다.
지난 27일 연방의사당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중이었다. TV 카메라 앞에서 말을 하던 매코넬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자신이 어디서 뭘 하던 중이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23초, 동료 의원과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그를 이끌어 퇴장 시켰다. 얼마 후 돌아온 매코넬은 기자회견을 재개했고,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해명했다.
매코넬은 지난 몇 달 사이 여러 번 공개석상에서 넘어졌다. 회의 참석차 방문했던 핀란드에서 눈길에 미끄러지고, 비행기에서 내리다 넘어지고,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넘어졌을 때는 뇌진탕에 갈비뼈가 부러져 몇 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던 매코넬은 걸음걸이가 원래 좀 불안한 편이다. 그럼에도 매코넬 의원실은 그가 84세가 되는 2026년, 이번 임기가 끝날 때까지 사퇴 계획은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나이가 들면 잃는 것이 많다. 젊음, 아름다움, 활기, 체력, 건강 등이 속속 사라진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품위이다. 늙어서 품위를 잃으면 참으로 초라하다. 품위를 지키는 길은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한평생 일궈온 것들을 때 되면 놓아 보내는 용기이다. 탁월한 정치인 파인스타인이 회의 진행상황도 인식하지 못한 채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은 가슴 아프다. 과거의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 대신 그는 쇠약한 노인의 이미지로 대중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존경받으며 품격 있게 떠날 때를 놓친 탓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것은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령으로 살날이 마냥 길어진 우리 모두 은퇴의 시점을 잘 잡아야 한다. 마무리가 품위 있어야 평생의 삶이 가치를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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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