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독서칼럼- 귀소본능

2023-06-12 (월)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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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트로스는 몸집이 컸지만 날갯짓 없이 하늘을 높이 날았다. 나는 날마다 거기가 거기인듯한 아무런 특색 없는 망망대해에서도, 녀석들은 어떻게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장장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 먼 거리를 비행한 후 자기가 태어난 둥지를 향해 직선거리로 날아온다. 녀석들은 아무리 먼 곳에서도 자기 집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그것을 자기 집으로 인식한다. 녀석들에겐 탁월한 귀소본능이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돌아가는 능력이 비상하고 탁월하다.
(베른트 하인리히의 ‘귀소본능’ 중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출생의 보금자리를 동경하는 귀소본능(the homing instinct)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귀소본능은 특별하다.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본능이 내면 깊은 곳에서 관솔불같이 수직으로 타오른다. 우리는 이 거룩한 욕망을 영혼의 귀소성(歸巢性)이라고 부른다.

팬데믹 이후 현대인은 나 홀로 병에 걸려 방황하고 있다. 인간 존재가 사회성을 잃어버리면 귀소본능은 결여된다. 귀소본능의 결여는 정체성의 위기를 낳는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다. 귀소본능이 빈약한 사람은 영혼육을 하나로 묶는 통합능력이 취약하다. 그 결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귀소본능의 위기를 겪었던 사람이다. 삭개오가 귀소본능의 위기를 겪은 것은 돈 때문이었다. 돈을 많이 벌면 즐겁고 행복할 줄 알았다.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와 이웃이 되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더 외로웠고 찾아오는 친구도 없었다. 돌아가 안식할 영혼의 보금자리도 그에겐 없었다.

영혼의 귀소능력을 상실한 삭개오는 군중의 시선을 피해 높은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삭개오는 거기서 종일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 때 문득 예수가 삭개오에게 다가왔다. 예수는 말씀했다. “삭개오야 거기서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날 밤 삭개오의 영혼은 예수의 품에 귀소(歸巢)했고 삶의 방향은 바뀌었다, 지고의 행복은 새벽 여명처럼 삭개오에게 다가왔다.

인생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to have)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 행복은 존재(to be)방식에 달려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주여 내 영혼이 당신 품에 안길 때까지는 내 영혼은 안식할 수 없나이다. 당신은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나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지금 나의 내면은 당신 품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향하여 귀소하고 있는가.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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