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가주 한인사회 중심사찰 샌프란시스코 여래사의 주지모시기 10년 공들임이 마침내 끝난 것 같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스스로 명명한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종단개혁 목소리를 높이는 창건주 겸 은사 설조 큰스님을 대신해 1991년부터 약 20년간 묵묵히 굳건히 여래사를 지킨 수원 스님이 본찰인 법주사로 돌아가면서 여래사는 상주할 후임주지를 찾지 못해 애로를 겪었다. 석달남짓 머물다 간 스님들이 즐비했던 탓에 각각 2년 안팎 여래사를 지킨 소원 스님과 광전 스님은 예외적인 장기근속 주지로 얘기된다. 그런데 지난 수년간 해제철이면 찾아와 여래사를 지켰던 승원 스님이 은사스님과 신도들의 청을 받아들여 여래사에 상주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여름안거를 마치고 여래사에 왔다가 11월 하순부터 4월 하순까지 초기불전 심화학습을 위해 경북 성주 자비선사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비자수속이 마무리됐다(3월). 4월29일 여래사로 귀환한 승원 스님 이야기를 싣는다. 인터뷰 대신 이야기라 칭하는 까닭은 스님 자신이 딱딱한 질의응답식 인터뷰보다는 격의없는 대화나누기를 선호하는데다 실제로 4일 오후 여래사에서 3시간30분간 대담 또한 그 방식으로 진행됐고 부족한 부분은 이후 전화통화와 전자우편으로 보충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님과 불교의 첫 인연이 궁금했다.
“불교와의 첫 인연은 모태신앙입니다. 출가후 법연회 회원들이 어머님의 공덕 덕분에 출가하게 됐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법연회라니?
“80년대 지역 불교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만난 선후배들과 참선공부를 하고자 만든 단체가 법연회입니다. 83년도에 창립해 현재까지 유지되고 출가후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회원들 중 공무원들이 많아 지역 시청불자회 태동이 되었고 출가자도 배출한 단체입니다.”
배냇불자답게 일찌기 법연회를 만들고 나아가 포교사가 되어 전법활동에 나선 그였으나 정작 출가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마치 여래사가 북가주 한인사회 중심사찰이면서도 상주할 주지스님을 모시지 못해 애태운 세월이 꽤 길었던 것처럼. 불심만큼 효심도 깊었던지 그는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쉰 다 돼서야 어머님의 승락을 받고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그 어머님이 이제 “차라리 그때 출가를 허락할 걸…” 하신다니 승원 스님은 불심 효심 다 고득점일 게 분명한 듯하다.
어머님의 허락을 기다리며 출가수행자 대신 포교사로 활동하던 시절 그는 참선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눈 밝은 스승을 찾아 수소문한다. “그러던 중 산골짝 허름한 농가에서 수행중이시던 ‘기’자 ‘성’자 법사스님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스님께 수식관 화두를 접하고 수행하는데 가끔씩 '출가해서 깊이 공부하라'는 말씀에 결심하고 모친을 설득한 후 출가하게 된 것입니다. ”
그런데 어인 일인가. 독실한 불자였던 모친의 만류로 출가가 늦어진 것도 뜻밖이거니와 물어물어 찾은 그 스님이, 참선을 가르쳐주고 출가수행까지 권유한 그 스님이 막상 출가의 뜻을 밝히자 상좌를 두지 않겠다며 스승되기를 한사코 거부한 것이다. 늦깎이 출가희망자의 각오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출가 안합니다.”
충청도 어디에서 빚어진 이 해프닝은 훗날 태평양 너머 북가주 여래사까지 이어지는 새 인연을 낳는다.
“(기성 큰스님은) 법은사로 남으시기로 하고 대신 저를 법주사 응주헌으로 데리고가셔서… (그렇게 해서) ‘설’ 자 ‘조’자 스님의 상좌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설조 큰스님의 불국사 주지 시절 불국사 선원 유나소임을 맡았던 기성 큰스님은 현재 천안 광덕토굴에서 수행중이다. 지금도 승원 스님이 찾아 뵐 때마다 “도 통하면 도인으로 살고 못깨치면 수좌로 살아라 좌복을 떠나지 말아라”고 당부 겸 분부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 설조 큰스님은 현재 조계종 승적부상 스님이 아니다. 중단없는 종단개혁 주장이 종단의 명예와 위상을 추락시킨 죄가 되어 대선캠페인과 승려대회 등으로 어수선했던 작년 초 ‘조용히 제적된’ 것이다. 설조 큰스님은 주변의 재심청구 권유를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총독부 허가를 받아가며 했느냐”며 거절, 제적이란 독배를 기꺼이 들이켰다.
“은사스님의 제적엔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이 아픕니다. 많은 연세에 종단을 위해 하셨는데… 우리 수행자들은 그래도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 은사스님이나 신도들로부터 여래사 상주권유를 받을 때마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며 사양했던 승원 스님이 여래사 상주를 결심한 데는 이런저런 변화도 영향을 주었지 않았을까. 특히 개혁의 화신으로 추앙받기는커녕 승적까지 박탈당하는 등 자기땅에서 유배당한 신세가 된 은사가 여래사를 지키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태평양을 넘나드는 모습을 차마 바라만 보기 힘들었지 않았을까.
“자주 오다보니 후임자가 없어 연로하신 은사스님의 안타까움, 어머니 같으신 보살님들의 애처로움, 다시 한번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뒤집어보고 이곳에 와서도 새벽 3시면 앉아 참선하고 예불하고 하다보면 이것이 수행이지 꼭 선방에 앉아야만 되는지, 오히려 어느 땐 더 환희심이 날 때도 있습니다. 때론 대중들이 없어 나태해질 때도 있지만 먼 타지라 항시 집중하게 되고 포교도 수행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에 오기로 했습니다.”
여래사의 향후 청사진과 운영방침을 묻는 질문에 “우선 여러 말씀도 듣고 해야지 당장 특별한 게 뭐 있겠느냐”며 내놓은 스님의 답변은 사뭇 특별했다. 여래사와 신도들, 그리고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하는 신행활동에 대한 태도 내지 철학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여래사는 사부대중의 부처님 터전입니다. 문을 활짝 열어놓겠습니다. 우는 이들과 같이 울고 웃는 이들과 같이 웃는 여래사, 공명하는 수행자와 사부대중이 머무는 여래사가 되도록… 고수가 되고 추임새를 잘 쓰면서 놀이 한판 즐기듯이 염불 간경 기도참선 수행으로 우리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정진도량, 함께 이루는 사찰이 되도록… ”
지난 몇년간 전화로 전자우편으로 대면으로 꽤 자주 소통해온 기자의 눈에 승원 스님을 관통할 만한 키워드는 겸손이다. 지난 겨울 성주 자비선사에서 한국불교의 강맥과 율맥을 잇는 선지식으로 평가받는 지운 스님으로부터 초기불전과 자비명상을 과외받듯 배웠음에도 그 방면에 대해 아는 티를 전혀 내지 않는다. 관련 클래스를 열어보시라를 말에는 “제가 가르칠 정도가 되나요” 한다, 정작 스님 자신은 비행기소음이 여간 아닌 여래사에서도 앉으나 서나 걸을 때나 자비명상을 수시로 한다면서도. 불교명상에서 유래했다고는 하나 깨달음이나 자비보다는 스트레스완화 등 심신건강을 위해 특화된 마음챙김명상이 표준화 상업화 덕분에 한국 등지에 역수입되고 있는 마당에 불교의 진수가 담긴 자비명상을 체계화하고 세계화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지, 자비명상의 명가(성주 자비선사)에서 자비명상의 대가(지운 스님)로부터 자비명상을 직접 배운데다 앞으로 상당기간 미국에 살게 되는 인연을 지었으니 단순히 여래사 지킴이를 넘어 자비명상 세계화 방면에서도 역할을 해야 되지 않은지, 때로는 단도직입적으로 때로는 에둘러서 의중을 타진하는 말에도 스님은 허허로운 웃음 아니면 묵묵부답으로 답할 뿐이다. 지운스님과 자비명상에 대해서는 향후 적절한 시점에 보다 상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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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