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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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을 건네주는 손길들

2022-10-07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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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던 지난달 25일 독일에서는 세계 신기록이 하나 세워졌다. 베를린 마라톤대회에서 케냐 선수 엘리우드 킵초게(37)가 2시간 1분 9초에 결승선을 통과, 4년 전 같은 대회에서 자신이 세운 기록(2시간 1분 39초)을 30초나 앞당겼다.

마라톤에서 인류의 꿈은 2시간 이내 완주다. 킵초게가 ‘마의 2시간’ 장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꿈의 영역에 훌쩍 다가선 것만도 놀라운 성취이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와 지난해 2020 도쿄 등 올림픽 남자마라톤을 2연패한 그는 인류사상 최고의 마라토너로 꼽힌다.

그가 관중들의 환호 속에 신기록의 기쁨을 누리던 순간 한쪽에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26.2마일을 달리는 동안 13번 물병을 건네준 자원봉사자 클라우스 헤닝 슐케였다. 킵초게가 어떤 성적을 낼지 노심초사하던 그는 “드디어 임무 완수!” - 행복감에 빠졌다.


마라톤 코스에는 5km 구간마다 급수대가 설치된다. 마라토너들이 수분과 양분을 보충하는 장소이다. 선수들은 대회 전날 각자의 영양음료를 준비해놓는데, 베를린 마라톤에는 특별한 전통이 있다. 최정예 34명의 선수들에 대해 자원봉사자들이 물병을 챙겨주는 서비스이다.

56세의 독일인 건축기사인 클라우스는 물병 봉사 25년의 베테랑이다. 그 자신 철인3종 경기 아마추어 선수여서 마라토너들의 심정과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아무런 이득 없는 일에 저렇게 열심일 수 있을까” 싶게 그는 물병 전달에 전심전력을 다한다. 그 점에서 그는 진정 베테랑이고, 아무도 기억 못할 그 일로 ‘영웅’이 되었다.

두 사람이 선수와 물병 봉사자로 처음 만난 것은 2017년이었다. 우연히 한 조가 되었는데, 킵초게는 그의 남다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18년 베를린 대회에 다시 도전했을 때 킵초게 팀은 그에게 봉사를 부탁했다. 대회전날 두 사람은 호텔에서 만나 어떻게 물병을 주고받을지 전략을 짰고, 결과는 세계신기록. 킵초게는 “당신이 없었다면 기록은 없었을 것”이라며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클라우스를 ‘나의 영웅’이라고 부른다.

시속 20km로 달려오는 선수에게 물병을 건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설프게 건네다 1~2초라도 지체되면 마라톤 기록이 바뀐다. 물병 전달 후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다음 급수대로 달려가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줄지은 카메라 팀과 자동차 대열을 뚫고 시속 40km로 달려야 선수보다 먼저 도착해 대기할 수가 있다. 지난달 25일 자전거로 쏜살 같이 달리는 그를 향해 군중들은 “물병 클라우스!”를 외치며 응원했다.

‘물병 클라우스’가 유명해진 것은 2018년 대회 이후였다. 마라톤 신기록 동영상이 온라인으로 퍼지던 중 선수에게 물병을 건네는 그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정신을 온통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다가 정확하게 물병을 전달하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저런 사소한 일에 저렇게 정성을 다할 수 있을까 -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정성을 다하면 결과가 달라진다. 킵초게의 이번 30초 단축 신기록 중 2~3초는 클라우스의 공이 아닐까 싶다. 대회 후 그의 물병전달 장면은 다시 인기를 끌고, “우리의 인생에도 ‘물병 클라우스’가 필요하다”는 댓글들이 올랐다.

체로키 족은 사람의 마음을 재미있게 해석한다. 우리의 마음은 육체적 필요를 챙기는 마음과 영적인 마음, 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생존에 필요한 욕구들을 충족시키려는 마음,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이다. 후자는 눈을 들어 밖을 보는 마음. 타자를 사랑과 이해로 보듬는 마음이다. 그런데 마음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 보니 전자가 커지면 후자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탐욕스런 사람에게서 자비와 선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클라우스의 물병’이 감동을 주는 것은 그 안에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수가 잘 달리기를 바라는 순수한 염원, 힘을 주고 싶은 긍정의 에너지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건 없이 내어주는 손길에서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때로 그런 손길은 감동을 넘어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되기도 한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테러로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40대의 한 남성은 빌딩 안에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 재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가 물병을 건네주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물병에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생과 사가 갈리는 극한 상황에서 사람은 영혼의 마음으로 가득해지고, 영혼과 영혼이 만나면서 신비로운 힘이 생겼을 것이다.

허리케인 이언이 플로리다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휩쓸면서 수백만 명의 삶이 뿌리 채 뽑혔다. 초토화한 삶의 터전을 재건하려면 정부차원의 대대적 지원이 시급하다. 그리고 그들의 무너진 삶의 의지를 되살리려면 ‘물병’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내밀어주는 손, 건네주는 ‘물병’으로 우리는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돌아보면 어려웠던 삶의 순간순간 ‘물병’을 건네는 손길들이 있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지금껏 살아왔을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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