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사에서… 서원에서… 세상 잡념 씻어내는 낙숫물 소리

2022-07-15 (금) 영주=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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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박자박 소웁탐방 - 영주 순흥면과 부석면

비로봉·연화봉·도솔봉. 소백산의 주요 봉우리는 불교적 색채가 물씬 풍긴다. 남쪽 산줄기 영주에는 부석사를 비롯해 비로사·성혈사 등 크고 작은 사찰이 둥지를 틀고 있다. 유교를 국가 지도 이념으로 삼은 조선 왕조 500년을 거치며 산 아래 평지에는 선비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들 고찰과 서원은 영주를 상징하는 문화재로 자리 잡았다. 여행길에 맑은 날만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기와지붕 처마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와 빗소리는 장마철에 만끽할 수 있는 또 다른 묘미다.

■낙조 못지않은 마음 정화, 무량수전 빗소리

지난 23일 부석사를 찾았다. 일부러 늦은 오후 시간을 택했지만,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니 낙조를 보기는 애초에 글렀다. 해발 450m 언저리 산자락이라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주차장에서 1㎞ 남짓,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걷는다.


양쪽으로 늘어선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면 단풍나무 터널 사이로 돌계단이 보인다.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사찰까지 가는 길보다 절에서의 이동이 더 힘들다. 가파른 경사에 건물이 층층이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산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다가서는 절이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범종루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요사채·선열당·보장각·향응각 등이 호위하듯 배치돼 있다. 안개에 휩싸인 산사에 정적이 흐른다. 범종루를 지나 다시 이어지는 계단은 안양루 아래를 통과한다. 한 발짝 오를 때마다 대웅전 격인 무량수전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무량수전 앞에는 석탑 대신 작은 석등이 세워져 있다. 방문객의 발걸음도 마지막 두세 계단을 남기고 잠깐 멈춘다. 석등 사이로 ‘무량수전’ 현판이 절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무량수전 마당에서 뒤로 돌면 마침내 안양루 너머로 시야가 탁 트인다. 날이 좋으면 소백산 산줄기가 은은한 노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곳이다. 해가 지고 푸르스름한 능선이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응시해도 좋을 풍경이다.

그날은 짙은 운무가 시야를 가렸다. 무량수전 처마 밑에서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비를 피하고 있는데, 일시적으로 소나기가 퍼붓는다. 기와지붕 골 따라 모인 빗물이 길쭉한 처마 끝으로 요란하게 쏟아진다. 세상의 모든 잡음이 빗소리에 흡수된다. 긴 가뭄 끝에 맞이하는 빗줄기가 성가시기보다 오히려 반갑다. 절간 주변의 숲도 생기를 되찾는 듯하다. 흘러내리는 낙숫물 뒤로 삼층석탑과 나무가 산뜻하다. 세상도 씻기고 마음속 묵은 때도 벗는다. 배흘림기둥에서 보는 낙조 못지않게 정화되는 풍경이다. 전각의 명칭처럼 시간도 공간도 무량수에 잠긴다.

부석사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테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전국의 수많은 사찰 중 7개에 꼽힌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긴 역사만큼 전해오는 이야기도 풍성하다. 부석사는 통일신라시대인 676년(문무왕 16) 의상 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했다. 삼국유사에 당나라로 유학한 의상과 그가 머무르던 집의 딸 선묘의 이야기가 창건 설화로 전해온다. 의상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한 선묘가 결국 그의 불심에 감화돼 귀국길과 사찰 창건까지 돕는다는 내용이다.

부석(浮石)은 ‘공중에 떠 있는 바위’라는 뜻이다. 커다란 바위 용으로 변한 선묘가 도적 무리를 쫓아내고 절을 지을 수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무량수전 뒤에 선묘 용이 변한 것이라 전해지는 바위가 있다.


소백산 다른 골짜기에 있는 비로사는 의상의 제자 진정이 창건했다. 의상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던 그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마음을 하나의 경지에 모아 흐트러짐 없는 상태)에 들었다가 의상에게 부고를 전한다. 효성에 감동한 의상이 소백산 추동에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했는데, 그곳에 지은 절이 비로사라 한다.

비로사는 부석사보다 더 가파른 계단식 사찰이다. 역사는 깊지만 선뜻 가보라고 권하기는 부담스럽다. 새로 지은 법당과 요사채 등이 남아 있지만 전형적인 절의 틀을 갖추진 못했다. 진공대사보법탑비, 비로자나불과 좌상 등 신라 말, 고려 초의 유물도 온전한 모습을 잃었다. 소백산국립공원 삼가탐방지원센터에서 약 2㎞, 계곡을 따라 제법 가파른 산길을 걸어야 한다. 대개는 소백산 정상 비로봉(1,439m) 등산길에 들르는 사찰이다.

이에 반해 엇비슷한 높이의 성혈사는 절간 마당까지 차로 갈 수 있다. 성혈사 역시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 절에 가는 목적은 단 하나, 나한전 문살을 보기 위해서다. 나한전은 대웅전 옆 조그마한 전각이다. 1984년 수리할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명종 8년(1553)에 처음 세웠고, 임진왜란 이후인 인조 12년(1634) 다시 지었다고 한다.

■죽계구곡 물소리, 소수서원 글 읽는 소리

소백산 자락의 유교 문화재도 장마철에 더 그윽한 정취를 뽐낸다. 부석사와 성혈사 사이에 초암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역시 의상이 임시로 초막을 지었던 터라고 한다. 전각은 대부분 새로 지은 것이라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대신 사찰 위아래로 이어지는 계곡은 경치가 빼어나 예부터 ‘죽계구곡’으로 불리고 있다. 구곡(九曲) 자체가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의 무이구곡에서 유래된 것이니 불교의 터전에 유교 문화가 꽃핀 셈이다.

죽계구곡 아홉 물굽이의 명칭은 계곡의 정취에 매료된 퇴계 이황이 손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의 문장가 안축의 ‘죽계별곡’의 모태가 된 곳이기도 하다. 구곡은 계곡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며 이어진다.

소백산국립공원 초암탐방지원센터를 기준으로 1~4곡은 상류에, 5~9곡은 하류에 위치한다. 따라서 초암주차장(4,000원)에 차를 대고 1곡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거나, 8곡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는 방식을 택한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거리가 2㎞ 남짓해 전체 구간을 왕복해도 크게 힘들지 않다. 9곡은 계곡 입구 마을에 동떨어져 있어 대개는 스쳐 지나간다.

탐방로는 대부분 숲속 오솔길이고 위험한 구간에는 목재 덱을 설치했다. 일부는 초암사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겹친다. 계곡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6~8곡에는 폭포 바로 앞에 전망대 겸 쉼터를 설치해 구곡의 옛 정취를 즐기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그래도 시원하게 발 한번 담그지 못한다면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초암사 인근 1곡과 2곡 주변에서 잠시나마 물가로 내려서서 더위를 식힐 수 있다. 특히 1곡 금당반석은 낮은 폭포 아래 넓은 암반으로 계곡물이 미끄러지는 모양새다.

영주 유교 문화의 뿌리는 누가 뭐래도 소수서원이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조선 중종 37년(1542) 안향을 모시는 사당으로 세웠고, 이후 유생들을 가르치는 백운동서원으로 발전했다. 안향은 국내 최초로 주자학을 연구한 고려 때의 학자다. 명종 5년(1550)에는 당시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임금이 직접 이름을 내리고 지원한 최초의 서원이다.

솔숲을 지나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이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와중에 어디선가 글 읽는 소리가 들인다. 환청인가 싶었는데 실제 의관을 정제한 장년의 두 유생이 강당에서 글을 읽고 있다. 주로 논어와 대학을 읊는다고 한다. 죽은 관광지로 여겼던 서원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아 더욱 반갑다. 때마침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까지 더해지니 잠시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하다.

<영주=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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