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별처럼 빛났던 저항시인 김지하가 도솔천을 건넜다. 우리 현대사의 격변기에 상징처럼 투혼을 발휘했던 민족시인 김지하, 그의 별세가 마음 한편을 허허롭게 만든다.
김지하는 나의 중동고등학교 1년 후배 동문이다. 본명은 김영일이다. 6.3 굴욕 한일협정 반대운동 때 다시 만났다가 내가 미국에서 17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낸 후 해후하게 되었다. 김지하의 막내 외삼촌도 나와 막역한 친구 사이다.
김지하의 아버지 김맹모씨는 빨치산이었다가 전향한 인물이다. 김지하 본인도 가까운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과거를 실토했고 글을 통해 공개한 적도 있다. 아버지 김맹모는 말년에 서울 종로구 ‘명륜극장’ 영사 기사로 또 영화간판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외삼촌 정일성 씨는 김지하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인물로 미국에 와 디트로이트에 살면서 동포들을 상대로 잠시나마 반정부활동을 한 바 있다. 정일성에 의하면 김지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유랑극단’을 이끌고 만주 등지까지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던 재사다. 어머니 정금성 씨는 이태영, 이희호 여사 민주화 운동 때 가끔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서울대 미술대학 미학과가 문리대로 편입되면서 김지하의 천재적 기재가 날개를 달았다. 김지하는 대학시절 심하게 폐병을 앓았다. 친구 송철원(서울대 정치과, 한국영상기록원장)의 부친 송상근 박사(철도병원장)가 그를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반대’, ‘한일 회담 반대’ 집회 때마다 김도현(전 문화체육부 차관), 김지하가 주로 성명서를 써냈다.
김지하와 가장 가까웠던 송철원에 의하면 교우 우학명의 자택에서 김정남(전 청와대 교문수석), 박재일(우리밀 살리기 운동 대표), 송철원 등이 비밀리에 모여 군부 반독재 성명서를 작성하다 발각돼 모두 구속당한 사건이 있었다. 김지하는 용케 피신을 하였고 대신 아버지 김맹모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지하가 크게 분노, 판소리 형태의 담시 ‘오적’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오적은 발표되자마자 김지하는 반공법으로 구속되고 이를 실었던 ‘사상계’는 즉각 폐간 당했다. 그 이후 김지하는 오적과 비슷한 형태의 담시 ‘비어(蜚語)’를 발표하여 또 한 번 박정희 정권에 충격을 가했다.
‘오적’과 ‘비어’가 처음으로 공개 발표된 것은 해외 최초 반독재 민주화운동 신문 ‘한민신보’였다. 당시 ‘오적’은 윤보선 전 대통령 부부가 워싱턴 방문 길에 원본을 정기용 발행인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김지하는 결코 굽히지 않고 시를 썼다. ‘남(南)’, ‘나의 어머니’,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흰그늘’ 등 시집을 남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백성을 사랑하고 독재 권력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절절한 감동으로 이어진 글들이다. 김지하의 저항은 수천년간 시달려온 우리 민족과 군사 정부의 민중탄압, 자본가들의 착취 횡포에 대한 처절한 고발이었다. 전 세계 문인들은 김지하를 주목했다. 그를 선구자로 존경하며 상을 주었다. 박 정권의 공작으로 노벨상은 후보로 좌절됐지만 정지용 문학상, 만해 문학상,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등을 수상했다.
몇 해 전이던가. 김지하는 만고풍상 오랜 시련에 쇠잔해진 모습이었다. 언어도 어눌해지고 몸짓도 부자연스러웠다. 장모인 ‘토지’의 작가 박경리와 부인 김영주와는 박정희, 박근혜 부녀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견해 차이로 상당한 갈등을 빚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는 글은 운동권 젊은 세대의 ‘아픈 용맹’을 선의로 저지하려던 것이다. 물과 피 모두 생명 존재의 요건이지만 피를 물처럼 흘려선 안 된다는 진리를 충고한 것이다. 그가 투신, 분신자살 유행 앞에 찬양 시를 썼어야 옳았단 말인가. 시인은 시인으로 존중해줘야 하는데 진보니 보수니 하는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재판하려 드는 소인배들의 아량이 원망스럽다.
우리는 말년의 김지하를 외롭게 하지 않았나. 모두가 반성해볼 일이다. 우리나라가 어둠에 빠져들며 혼미해질 때 김지하가 새벽별이 되어 다시 사람들이 그의 뜻을 되새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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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