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좋아하는 대통령도 있고 싫어하는 대통령도 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국민은 그의 일거수에 우왕하고 일투족에 좌왕한다. 그러니 대통령이 좋아하는 와인 역시 인구에 회자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와인의 역사에서도 그러한 대통령을 찾을 수 있다. 와인에 대한 안목과 식견이 굉장히 탁월한 사람이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했으며, 초대 국무장관, 2대 부통령을 거쳐 미국 3대 대통령을 지냈다. 나폴레옹 1세에게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늘리기도 했으니, 러시모어산에 조각된 큰 바위 얼굴 가운데 한 명이자 2달러 지폐의 주인공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다.
■와인 대통령, 제퍼슨
제퍼슨이 와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감별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증거가 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등급체계인 보르도 그랑크뤼클라세 1855 와인 목록이다.
이 등급체계는 1855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라피트(현 라피트 로칠드), 마고, 라투르, 오브리옹 등 4개 샤토(와이너리)의 와인이 1등급에 선정됐다. 제퍼슨은 이 공식 등급이 만들어지기 70년 전 해당 와인들을 1등급으로 꼽았다. 2등급의 첫째 브란느 무통(현 무통 로칠드)과 유일하게 특1등급으로 지정된 소테른의 화이트 와인 샤토 디켐도 이미 그가 극찬했다. 이 외에도 그는 론 지방의 화이트 에르미타주도 높게 평가했다. 샴페인, 마데이라, 말라가, 라인, 셰리, 샹베르탱, 몬테풀치아노도 그가 즐겨 마신 와인이다.
제퍼슨이 언급했거나 그와 작은 인연이라도 있는 와이너리들은 오늘날에도 ‘대통령’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엮어 홍보한다. 제퍼슨은 미국에서 존경받는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와인 애호가이자 자타공인 와인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포도 나무 심고 와인 셀러 만들고
그는 버지니아주 부농 집안 출신으로 청년 시절부터 여러 와인을 접했다. 이런 환경 덕에 자연스레 와인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스물여섯에 직접 설계한 집(몬티첼로)을 지을 때 와인 셀러를 가장 먼저 지었을 정도다. 두꺼운 이중벽에 길이 5m, 폭 4.5m, 높이 3m에 이중 잠금장치를 달아 와인을 안전하게 보관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와인 생산국이 아니라 그의 셀러에는 수입 와인만 가득했다. 보기만 해도 ‘배부를’ 와인을 보며 제퍼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셀러에서 꺼낸 와인 한 병을 잔에 따라, 테라스 흔들의자에 앉아 석양을 즐겼겠다. 미국에서도 와인을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꾸면서.
제퍼슨은 꿈만 꾸지 않았다. 1771년 자신의 농장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이탈리아 이민자인 ‘필리포 마제이’에게는 땅을 내주고 유럽산 포도나무를 재배하게 했다. 하지만 포도나무를 재배하기엔 날씨가 혹독했다. 게다가 유럽산 포도나무는 필록세라 등 포도나무 전염병에 저항성이 약했던 탓에 재배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그는 희망의 싹을 살려 갔다.
1775년엔 버지니아 대표로 대륙회의에 참석하고 이듬해엔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발돼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북아메리카 영국 등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포르투갈산 마데이라 와인으로 건배했다. 독립전쟁 중인 1779년에는 버지니아 주지사가 됐다. 이 시기에 그는 와인 안목이 더 높아졌다. 보르도, 부르고뉴, 독일산 리슬링, 샴페인의 공식 재고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사 생활, 운명적 만남
이후 여러 이유로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미국 몬티첼로로 향했다. 그런데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와 외가에서 거대 농장과 200여 명의 노예를 유산으로 받았지만 막대한 빚까지 상속받은 탓이다. 설상가상으로 독립전쟁 전에 팔았던 토지대금마저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뚝 떨어졌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컸던 데다 배우자마저 세상을 떠나자 제퍼슨은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은퇴 생활은 우울하기만 했다. 그러다 곧 기회가 찾아왔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제2대 주프랑스 미국 공사로 임명된 것이다. 몬티첼로를 떠난 그는 1784년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렀다.
제퍼슨에게 프랑스 공사 생활은 와인의 안목이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공사 임무에 충실한 가운데 그는 와인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러 와이너리를 탐방하고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거나, 프랑스인들의 초대를 받아 함께 와인을 마셨다.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미국에서도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줄곧 맴돌았다.
제퍼슨은 와인 산지를 두루 다녔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부르고뉴에서 론을 거쳐 프로방스, 랑그도크, 보르도,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까지 여행했다. 포도나무 재배법에서부터 와인 양조와 유통에 이르기까지 면밀하게 조사했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그는 인건비와 와인 가격이 어떻게 책정되는지 등 미국 와인 산업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꼬치꼬치 캐물어 세세하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당시 유통 과정은 오늘날과 사뭇 달랐다.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병에 직접 담지 않았다. 와인을 오크 통째로 중간상인에게 넘기면 그들이 병에 와인을 담았다. 이 과정에서 와인에 물이나 품질이 상이한 와인을 섞기도 했다. 심지어 넣으면 안 되는 물질을 첨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 ‘반드시 병에 와인 담아 봉해달라’ 편지로 쓴 주문
와인 유통 과정을 파악한 제퍼슨은 와이너리에 특별 주문을 했다. ‘반드시 와이너리에서 직접 병에 와인을 담아 밀납으로 봉해달라’고 말이다. “만약 와인이 귀하의 영지 내에서 병입되고 포장된다면 의심할 바 없이 진품이며…” 그가 라피트 주인에게 와인 250병을 주문하면서 쓴 편지글이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해, 제퍼슨은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혁명이 끝난 2년 뒤에 미국 제3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프랑스에 있을 때 와이너리에서 직접 병입한 많은 고급 와인을 미국으로 보냈다. 대통령이 돼서도 연간 600병의 프랑스 와인을 주문했다.
미국 건국 초기 대통령들은 봉급이 없었다고 한다. 제퍼슨은 사비로 와인 값을 충당해야 했다. 대통령 퇴임 때인 1809년, 그의 와인 외상값이 현재 가치로 치면 약 16만 달러(약 2억 원)에 달했다. 그는 빚쟁이들을 피해 다녀야 했을 만큼 사정이 어려웠다. 당시엔 퇴임 대통령을 위한 국가 지원도 없었을뿐더러 원래 빚도 많았던 데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탓이 컸다.
그 와중에도 그는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는 등 의미 있는 활동을 이어갔다. 화재 탓에 사라질 뻔한 의회도서관은 제퍼슨이 헐값에 처분한 장서 덕에 보존됐다. 여전히 연간 400병의 와인을 주문할 만큼 와인을 좋아했지만, 더 이상 고급 와인을 입에 대지는 못했다. 남프랑스나 보르도 스타일의 평범한 와인을 마시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9년이 지난 1985년 12월 5일. 크리스티 경매에 ‘Th. J.’ ‘Lafitte’ ‘1787’이 음각된 와인 한 병이 출품됐다. 제퍼슨이 구입했거나 소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1787년산 라피트(현 샤토 라피트 로칠드)였다.
와인을 내놓은 하디 로덴스톡은 유명한 와인 수집가였다. 그가 주관한 여러 시음회에는 부유한 와인 애호가들은 물론 샤토 디켐과 와인잔으로 유명한 리델의 사장인 게오르그 리델, 로버트 파커, 휴 존슨, 잰시스 로빈슨, 제임스 서클링 같은 저명한 평론가가 초대됐다.
경매에 나온 ‘대통령의 와인’ 소동
이런 사람이 내놓은 ‘대통령의 와인’이니 세간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오브와인(MW)이자 크리스티 와인 경매 총괄인 마이클 브로드벤트가 진품임을 보증하고 경매를 진행했다. 경합 끝에 와인은 무려 10만5,000파운드(약 2억 원)에 낙찰됐다. 경매 사상 최고 액수였다. 브로드벤트도, 낙찰받은 포브스 사주 일가도, 끝까지 경합한 와인스펙테이터 사주 마빈 생컨도 상상하지 못한 금액이었다. 이 기록은 22년 뒤인 2007년에 깨진다.
제퍼슨의 와인, 1787년산 라피트. 198년 된 올드 빈티지 와인은 포브스 갤러리에 제퍼슨의 편지 세 통과 함께 전시됐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보관법을 몰랐던 갤러리 관계자의 실수로 이 와인은 수난을 겪는다.
밝은 전등불 아래 와인을 세워 둬 뜨거운 열기에 코르크가 쪼그라들었고, 와인병 속에 빠져버렸다. 포브스는 속마음이야 어쨌든, 와인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와인이라 구입한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한편, 고급 와인과 오래된 빈티지 와인 수집가인 억만장자 빌 코크가 ‘출처가 같은’ 또 다른 제퍼슨 와인을 낙찰받았다. 그런데 그는 와인 진위에 의심을 품었다. 그의 집요한 진실 찾기에 FBI와 전직 영국 정보요원은 물론 과학자, 역사학자, 유리 전문가, 서체 전문가 등이 나섰다. 무려 200년 가까이 된 와인의 진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실은 의외의 것에서 드러났다. 병에 글자를 음각한 도구가 18세기의 것이 아닌 현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포브스의 와인도 가짜였을까. 당시 경매를 진행한 브로드벤트는 자신의 경력에 오점을 남겼음을 인정하며 포브스에 연락했다. 하디 로덴스톡이 “위조한 가짜 와인”이라고.
■ “위스키 해독제는 와인뿐”
제퍼슨은 자작농 중심의 농업경제를 부르짖었다. 자국에서도 와인을 생산할 수 있음을 외쳤다. 그의 바람은 반은 성공한 듯하다. 그가 ‘애정한’ 와인은 불모지 미국에 뿌리를 내렸다. 미국은 현재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에 이어 세계 4위의 와인 생산국이 됐다.
“와인에 사치품과 같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는 국민의 건강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같다.”
“와인을 값싸게 구할 수 있는 나라의 국민은 술에 취하는 법이 없고, 독한 증류주가 값비싼 와인을 대신하게 된 나라의 국민은 깨어 있는 법이 없다. 위스키의 해독제는 와인뿐이다.”
제퍼슨이 남긴 어록이다. 당시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로 인한 사회문제가 심각했다. 제퍼슨의 말에는 와인을 좋아하는 한 개인의 마음과, 미국 와인 산업의 미래와 국민을 위하는 대통령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대통령의 와인’은 가짜였지만, 대통령의 마음은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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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