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피자의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업계 1위 도미노가 지난달 27일 피자 10종의 가격을 인상했다. 파파존스도 8년 만에 가격 인상을 결정해 다음 달 2일부터 한 판당 1,000~2,000원씩 비싸진다. 또 다른 브랜드 피자알볼로도 평균 5~6% 가격을 올렸다. 중저가, 이른바‘가성비’ 브랜드인 피자마루와 피자스쿨 등도 이미 판당 가격을 1,000원씩 올린 상태이다. 물가 상승의 조짐은 께름칙하지만, 상황을 뒤집으면 우리 일상 속 피자의 입지가 보인다. 예전에는 짜장면 같은 음식만으로 물가 상승을 판별했지만 이제 그 지분을 햄버거, 치킨과 더불어 피자가 상당 부분 가져갔다. 혹자는 바뀐 입맛만을 이유로 돌릴 수 있겠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같은 밀가루 음식이지만 짜장면은 면이 잘 붇고 개인 분량으로 나뉘어 여러 그릇이 딸려 온다. 반면 피자는 배달에 잘 버티며 다인분이 한꺼번에 포장돼, 의외로 쓰레기가 아주 많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태생적 장점 덕에 피자는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일상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작년 11월 출간된, 피자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요리책 ‘모더니스트 피자’에 의하면 세계 모든 나라 가운데 단 두 곳, 오세아니아의 키리바티와 투발루에서만 피자를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전자는 나라 전체가 바다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해 있고, 후자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적은 나라이다. 심지어 북한만 하더라도 2009년 평양에 피제리아가 들어섰다. 하필 가격이 오를 때라 다소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이런 기회라도 잡아서 피자의 역사를 살펴보자.
■이탈리아의 피자
지금이야 ‘피자=토마토소스’의 공식이 조건 반사처럼 떠오르지만, 사실 토마토가 피자의 붙박이 재료로 자리 잡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전까지 피자란 납작빵에 다양한 종류의 ‘토핑’ 즉 고명을 얹는 음식을 의미했다.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는 7,000년 전부터 빵을 구워 먹은 흔적이 남아 있었고, 여기에 고명만 얹으면 피자와 비슷한 음식이 된다. 그리고 그런 기록이 실제로 고대부터 역사 곳곳에 남아 있다. 기원전 6세기, 다리우스 대왕의 병사들은 방패에 올린 납작빵에 치즈와 대추야자 등을 얹어 먹었다. 한편 고대 그리스에는 허브, 양파, 치즈와 마늘 등을 올려 맛을 낸 납작빵 플라쿠스를 먹었다. 현대에는 별도의 빵 형식으로 자리를 잡은 이탈리아의 포카치아, 그리스의 피타 등을 피자의 직계 선조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은 몇천 년 전부터 있어 왔지만, 우리가 오늘날 피자라 아는 음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8세기이다. 당시 나폴리는 부르봉 왕조의 지배 아래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했는데, 경제가 성장에 발을 맞추지 못해 도시가 가난에 시달렸다. 그런 가운데 최빈층인 라자로니(lazzaroni, 누더기를 입은 행색이 성경 속 인물 라자루스를 닮아 붙은 명칭)는 단순 노동을 통해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으니, 싸고도 먹기 편한 음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매장도 아닌 노점을 통해 오늘날의 피자와 흡사한 음식이 등장해 팔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피자는 역시 밀가루가 대부분인 가운데 맛을 들이기 위한 고명도 마늘과 라드(돼지기름), 소금으로 단출했다. 태생이 이런 음식이었던 탓에 피자는 음식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9세기 최초의 요리책이 등장했을 때에도 피자는 기록으로 남지 않았으며, 나폴리의 요리 세계를 책임지는 이들은 아예 언급조차 하기를 꺼려 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라자로니의 경제 및 사회적 상황이 나아지면서 최초의 피제리아가 등장했다.
비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피자의 팔자는 이탈리아의 통일과 더불어 조금씩 피기 시작했다. 전환점이 된 사건은 1889년에 벌어졌다.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 움베르토 1세가 사보이 왕국의 여왕 마르게리타와 더불어 나폴리를 방문했다.
복잡한 프랑스 음식에 질린 두 사람은 나폴리의 지역 음식을 요청했으니, 이에 피자이올로(피자 장인) 라파엘 에스포지토가 세 가지의 피자를 만들어 화답했다. 각각 라드와 카치오카발로(복주머니) 치즈, 라드를 얹은 피자, 치어(稚魚)를 얹은 피자, 그리고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 그리고 바질을 얹은 피자였다. 모든 피자가 여왕의 마음에 든 가운데 특히 세 번째 피자를 좋아했으니, 그의 이름이 붙은 피자 마르게리타가 탄생했다.
■미국의 피자
이탈리아와 더불어 피자의 양대산맥인 미국의 피자 부흥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됐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탈리아의 이민자들이 뉴욕을 비롯한 미국 동해안에 정착하면서 피자 또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최초의 피제리아인 롬바르디스가 뉴욕의 리틀 이탈리아 구역에 문을 열어 마르게리타 피자를 팔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의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현지에서도 지역의 식재료를 활용한 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0년 이후, 미국이 경제 및 기술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피자의 변화 또한 급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목할 만한 갈래 둘을 꼽자면 첫 번째는 피자의 가정화였다. 가정의 가처분 소득이 늘면서 냉장고 및 냉동고가 보편화되고 이 틈을 타 좀 더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수요도 증가했다.
그런 추세를 틈타 냉동 피자가 등장하면서 형식의 변화가 대폭 이뤄졌다. 도우가 조리 과정에서 마르는 것을 막기 위해 토마토소스의 양이 늘었으며, 치즈 또한 냉동에 잘 버티는 종류로 새롭게 개발되어 피자에 올라갔다.
두 번째 변화는 피자의 상업화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급증하자 배달이 가능해졌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피자가 등장했다. 1960년대에 톰과 제임스 모나한이 미시간주에서 ‘도미닉스’를 차려 피자 배달을 시작했는데, 빠른 배달로 명성을 얻자 우리가 아는 이름 ‘도미노스’로 바꾸고 전 미국으로 사업을 확장시켰다.
오늘날 미국에는 이탈리아의 원형인 나폴리탄부터 그 변형인 뉴욕, 두툼한 파이 같은 시카고식, 사각형의 디트로이트식, 캘리포니아식, 세인트루이스식 등 다양판 지역적 변주가 자리를 굳건히 잡고 있다. 매일 인구의 13%가 피자를 먹고 있을 정도로 미국은 피자의 나라로 변모했다.
■한국의 피자
국내에는 1945년 미군에 의해 피자가 소개됐다. 미군부대 근처의 술집들이 그네들이 애타게 찾는 피자를 안주로 내놓으면서 우리에게도 소개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1963년에는 국내 최초로 피자를 만들어 판 음식점 힐탑 바(이후 피자힐로 개명)가 문을 열었다.
아직도 건재한 피자힐은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역피라미드형 건물로도 잘 알려졌지만, 외국 국빈이나 주한 외국인 그리고 한국인 VIP에게만 개방됐다. 당시 피자는 대중적인 음식이 아니었다. 1967년 동아일보의 기사에 의하면 ‘제6대 대통령 취임식 국빈 대접에 피자 파이가 포함돼 있다’는 내용이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피자는 본격적인 국내 진출을 시도했다. 경로는 주로 경양식당이었다. ‘서양 음식의 대표주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소개됐다. 다만 이탈리아 전통 음식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과 달리 미국식 피자였다. 1984년 최초의 이탈리아식 피자집 ‘피자가게’가 문을 열었으며, 이듬해 피자헛이 진출해 점포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당시 37세의 성신제가 직접 미국 본사로 찾아가 사업권을 따왔고, 이태원에 첫 점포를 열었다. 큰 인기를 누리자 본사가 진출을 결심, 소송을 통해 사업권을 따내 직접 운영을 시작했다.
1990년에는 미스터피자가 이대에 첫 매장을 열었고, 최근 업계 2위로 올라선 파파존스는 2003년 압구정점을 통해 국내에 진출했다. 2014년에는 본격적인 마르게리타 피자를 내놓는 부자피자가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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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