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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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12알을 먹었더니 새해가 밝았다

2022-01-12 (수)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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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재의 식사 - 세계의 새해 음식

크리스마스에 이어 세계의 새해 음식 또한 소개해야 짝이 맞으리라 생각하던 차, 흥미로운 외신을 접했다. 한국계 미국인 앵커인 미셸 리의‘매우 아시아계 다운(#VeryAsian)’ 해시태그 이야기이다. 아기 때 한국에서 입양된 미셸 리는 NBC 뉴스 계열사인 세인트루이스의 KSDK에서 일하는, 경력 20년이 넘는 베테랑이다. 뉴스에서 미국의 새해 음식을 간략히 소개한 그는 마지막에 “저는 만둣국을 먹었어요. 한국의 새해 전통 가운데 하나죠”라고 단 두 마디를 덧붙였다. 한국계인 자신의 정체성 또한 이민자 국가인 미국의 일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단 두 마디 탓에 그는 비난을 받는다. 한 여성 시청자가 그에게 “너무 아시아인 티를 낸다(Very Asian). 한국적인 것은 혼자 즐겨라”라고 음성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인종차별적인 의도가 또렷하게 담겨 있는 메시지를 받고 그는 소셜 미디어에 리액션(음악 등을 들으며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것) 비디오를 올려 대응했다. 그러자 곧 폭발적인 반응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VeryAsian’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자신들의 새해 전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의사이자 영화배우인 켄 정, 옛 스타트렉의 출연자 조지 타케이 등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계 미국인 유명인사들도 참여해 ‘아시아인 다운’ 해시태그가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다, 우리는 새해에 떡이나 만두를 넣어 끓인 국을 먹는다. 위도를 기준으로 북부 지방에서는 만둣국, 남부 지방에서는 떡국을 먹고 중부 지방에서는 떡만둣국을 먹는다. 남북한 전체가 기준이므로 중부지방이라면 강원도인데, 이러한 경향은 지역에 따른 재배 농작물의 차이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북부 지방에서는 아무래도 기온이 낮고 강수량이 풍부하지 못하니 벼농사 대신 밀농사가 강세였다. 따라서 밀가루 반죽으로 만두를 빚어 먹었는데 특히 함경, 평안, 황해도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북부지방의 만두는 돼지고기와 숙주 등을 넣고 큼지막하게 빚는 게 특징인데, 둥글게 모양을 잡아 양 귀퉁이를 붙이는 모양새는 조선시대의 화폐 마제은(馬蹄銀)을 닮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꿩고기 국물을 쓰는 것도 북부지방 만둣국의 특징이다.

한편 북부지방 가운데서도 개성에서는 설에 조랭이떡국을 끓여 먹는다. 개성의 조랭이는 여느 떡국에 들어가는 가래떡에 비해 가늘고 짧으며 누에고치처럼 가운데가 잘록하다.

일제강점기 반찬가게를 운영했던 음식 저술가 홍선표의 ‘조선요리학’에 의하면 개성만의 개성은 고려를 향한 신심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조선 개국 초, 고려의 신심으로 조선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떡을 비벼 비틀어 만든 조랭이로 떡국을 끓인 것이다.

요리 연구가이자 인간문화재인 황혜성의 요리책 ‘고향의 맛 향토요리’의 레시피는 ‘지름이 2㎝ 정도 되는 가래떡을 준비해 대나무 칼이나 얇은 주걱으로 0.5㎝ 두께가 되도록 둥글게 끊은 다음 다시 가운데를 문질러 8자형으로 떡의 가운데가 잘록해지도록 만든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떡국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조랭이떡국의 유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다. 무엇보다 오래된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처음 먹기 시작한 시기를 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친일파로 변절한 문화 운동가였던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습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상고시대의 신년 제사 때 먹었던 음복 음식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쓴 바 있다.

떡을 주식으로 먹었던 시대의 관습이 남아 내려온 한편, 천지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새해 첫날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원시종교적 사상에서 흰색의 가래떡을 끓였다는 것이다.


떡국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조선 중기 사람 이식(1584~1647년)의 ‘택당집’에 남아있다. 그는 택당집에서 설차례의 제물 진설법에 대해 설명했는데 ‘병탕, 즉 떡국과 만두탕 각 한 그릇, 과일 세 종류, 식혜는 각각 한 그릇씩, 적은 세 꼬치를 담아 한 접시를 올린다’라고 밝혔다.

그 밖의 기록은 모두 18~19세기의 것이니 문인 이옥(1760~1815년)은 영남의 하층민이 떡국 대신 메와 탕 등으로 제사를 지내자 남은 음식을 싸가지고 심부름을 온 아이에게 “우리나라 풍속에 떡국 그릇으로 나이를 계산하는데, 나는 금년에 떡국을 먹지 않았으니 한 해를 얻은 셈이요, 너희들은 지금까지 세월을 헛먹은 것이다”라고 농을 건넸다고 한다. 당시에도 이미 설날에 떡국을 먹어야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는 방증이다.

한편 조선 후기 사람인 최영년(1856~1935년)도 해동죽지에 수록되어 있는 ‘명절풍속’에서 ‘매년 설날 아침 조상님께 떡국을 올린 다음 온 집안 식구끼리 나눠 먹는다’며 ‘떡국차례’라는 용어를 쓴 바 있다.

마지막으로 김매순의 열양세시기(1819) 홍석모의 동국세시기(1849)에서 떡국을 ‘정조차례와 세찬에 없으면 안 될 음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 중기 이후의 기록만 남아 있으므로 조랭이떡국의 유래는 떡국에 뿌려 먹는 후추 수준의 양념처럼 받아들여도 좋을 듯싶다.

■각국의 새해 음식

우리의 새해 음식인 떡국에 대해 충분히 살펴 보았으니 후식 삼아 세계 새해 음식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스페인에서는 새해를 알리는 0시의 종이 울리면 한 번에 한 알씩 포도를 먹는다. 이러한 풍습은 1909년 알리칸테 지방에서 비롯되었다. 지역 전체 면적의 4분의 1이 포도밭일 정도로 포도가 넘쳐나다보니 처리를 위한 궁여지책으로 소개되었는데, 이후 포르투갈을 비롯해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베네수엘라, 쿠바, 멕시코, 에콰도르, 페루 등으로 퍼졌다. 열두 알의 포도는 각각의 달 또한 상징하므로 맛에 따라 그 달의 운세 또한 점쳐볼 수 있다. 보통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며 시계가 열두 번 울리는 동안 열두 알을 다 먹어야 하는데, 페루에서는 열세 번째 포도알까지 먹는 풍습이 있다. 석류 또한 새해 음식으로 사랑받는다. 석류알이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으로, 그리스에서는 알이 널리 퍼지도록 석류를 통째로 바닥에 던져 새해를 축하한다.

생선을 통으로 먹는 풍습도 있다. 성스러운 휴일에 육식을 금하는 가톨릭교회의 규율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가지를 쳐 나왔다. 덴마크나 이탈리아 등에서는 대구를, 폴란드나 독일 등에서는 청어를 즐겨 먹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도 염장 덕분에 오랫동안 생선의 저장 및 운반이 가능했기 때문에 지킬 수 있던 풍습이다.

독일에서는 잉어를 먹는데, 행운의 상징으로 그 비늘 몇 개를 지갑 속에 지니고 다닌다. 한편 동양에서는 물살을 가르는 거침없음이나 알을 통한 다산 및 풍요의 이미지를 좇아 생선을 먹는다. 중국에서도 통으로 조리한 잉어를 먹고, 일본에서는 새해의 전통 음식으로 새우나 청어알을 먹는다.

겨울 잎채소와 콩은 돈과 닮아 새해의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각각 채소는 지폐, 콩은 동전을 상징하니 새해에 돈을 많이 벌자는 염원이 담겨 있다. 녹색의 넓은 이파리가 특징인 케일, 근대, 양배추 등이 돈을 닮은 채소인데 덴마크에서는 케일 스튜를 끓여 설탕과 계핏가루를 뿌려 먹고, 독일에서는 채쳐 발효시킨 양배추 절임인 사워크라우트를 즐긴다.

한편 미국 남부에는 흑인의 소울푸드인 콜라드 그린이 있다. 진녹색 잎채소로, 훈제 돼지 족발이나 다리 관절로 우린 국물에 넣어 푹 끓여 먹는다.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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