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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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번의 조상, 혼종…와인 명산지·포도 품종의 기원

2021-10-06 (수) 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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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실의 역사속 와인 - 와인 블렌딩

와인은 대개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든다. 블렌딩하는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는데, 날씨도 중요한 요인이다. 프랑스 보르도 지역 또한 날씨 변덕이 심하다. 이 탓에 포도 품질이 균일하지 않게 재배될 수 있어, 블렌딩은 이를 방비할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한다. 보르도에서 레드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주품종으로 카베르네 프랑, 말벡, 카르메네르, 프티 베르도를 블렌딩한다. 화이트 와인은 세미용과 소비뇽블랑을 주 품종으로 뮈스카델을 블렌딩한다.

서두에 보르도 품종을 거론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17세기 샤토 오브리옹을 다룬 예전 칼럼에“포도 품종에 대한 언급은 없네요”라는 댓글을 본 터였다. 오브리옹은 15세기에 역사가 시작돼 메독 지구가 개발되기 전인 17세기 중반까지 독보적인 보르도 최고급 와인이었다. 사실 필자도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이번 칼럼은 댓글에 응답하는 짧은 역사 여정인 셈이다.

■부르디갈라, 와인의 요람


프랑스 와인의 역사는 로마 시대인 기원전 50년경에 시작됐다. 로마인들이 갈리아, 오늘날의 프랑스를 속주로 삼고 남쪽 가이야크 지역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이들은 수송이 편리한 부르디갈라(오늘날의 보르도)를 주도로 삼아, 40년경부터는 이곳에서도 포도를 재배했다.

그런데 부르디갈라는 대서양의 영향을 받는 해양성 기후 지역이다. 지중해성 기후인 남쪽 지방과는 달리 습하고 서늘하다. 기후가 다른 남쪽에서 가져온 포도나무를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옮겨온 포도나무들은 이내 죽거나, 열매를 맺어도 포도가 익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편 부르디갈라를 가르는 가론강 연안에는 비투리게스(Bituriges)인들이 정착해 살았다. 그들은 부르디갈라의 풍토에 맞는 포도나무를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스페인)에서 들여와 성공적으로 재배했다. 로마의 플리니 디 엘더는 이들이 기른 품종을 ‘비투리게스인들이 재배했다’ 하여 ‘비투리카’라 칭했다. 비로소 부르디갈라에 포도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부르디갈라, 즉 보르도가 본격적으로 와인 산지로 부상한 때는 12세기 즈음이다. 그곳의 영주 알리에노르와 혼인한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헨리 플랜태저넷이 영국의 왕이 되면서부터였다. 정치적 지리적으로 당시 최대 와인 수입국인 영국과 가까운 덕에 보르도는 와인 산지로 승승장구했다. 보르도는 이때부터 300여 년 동안 포도나무를 재배할 수 있는 땅이라면 어디든 포도밭으로 탈바꿈했다. 다만 습지인 메독 지구만은 예외였다.

■전쟁이 바꾼 ‘와인 오아시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보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년전쟁이 막을 내린 15세기, 영국령이었던 보르도는 프랑스령으로 귀속됐다. 그런데 당시 보르도는 이 결과를 반길 수 없었다. 프랑스와 영국 양쪽으로부터 엄청난 세금 압박과 함께 수출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보르도는 양국의 정치적 줄다리기 속에서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려 200년이 흐른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보르도 와인이 다시 호황을 맞는다. 한자동맹에 이어 네덜란드 와인 상인들이 보르도, 특히 메독 지구의 와인 산업에 관여하면서부터였다.


앞서 언급했듯 메독 지구는 원래 습지였다. 농사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곳이라, 사람들은 이곳에서 주로 가축 사료용 풀을 재배했다. 이따금 귀족들이 사냥터로 활용할 뿐인 별 볼 일 없던 땅, 그런 땅이 오늘날 최고의 와인 산지로 ‘둔갑’한 것이다.

당시 메독 지구 포이약 마을에는 무통(오늘날의 샤토 무통 로칠드)의 영주 ‘마르게리트 드 푸와 캉달’의 남편 ‘장 루이 드 노가레 드 라 발레트’라는 사람이 있었다. 노가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유능한 군사령관이었다. 종교전쟁이 한창일 때 위그노(프랑스 신교도)의 근거지인 라로셸을 포위해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프랑스 왕실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라로셸 전투(1627~1628)를 치르던 중 얀 레이흐바터르(Jan Leeghwater)라는 네덜란드인 수력학(水力學) 기술자를 알게 된다. 그는 얀에게 메독 지구의 물을 뺄 방법을 의논해 도면을 받아냈다. 확신에 찬 노가레는 시의회에 안을 상정해 간척 허가를 받았다.

보르도 와인 유통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네덜란드 와인 상인들과 메독의 영주들이 이 소식을 반기며 노가레를 지지했다. 간척 공사에 참여하는 상인들과 영주들에게 50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는 특혜까지 부여했으니 말이다.

간척 사업은 바람을 탄 범선처럼 순항했다. 이윽고 물이 빠지자 바닥을 드러낸 메독 지구의 토양은 배수가 좋은 크고 작은 자갈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야흐로 최고의 와인 산지로 거듭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이미 샤토 오브리옹의 성공을 목격한 바 있기에, 마치 원석처럼 모습을 드러낸 메독 지구를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그들은 좋은 땅을 앞다투어 사들였다. 사들인 땅은 개간해 밭을 만들어 포도나무를 심었다. 당시 최고의 고객인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의 ‘니즈’에 답하고자 아낌없이 투자했다. 와인 명산지 메독 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얀·노가레가 바꾼 와인 역사

노가레의 행적을 보자면, 그는 와인 역사에 길이 빛날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무통가(家)의 문서에서 기록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노가레는 자녀들에게 영주권은 물론이고 자신의 성(姓) 대신 아내의 성을 이어받도록 했기 때문이다.z

그런데 운명의 보상이라고나 할까, 알렉상드르 뒤마가 쓴 ‘삼총사’의 주인공 다르타냥의 실제 모델이 바로 노가레라고 한다. 다르타냥이 당시 남서부 지역에 실존한 인물이라고는 하나, 인물 성격이나 라로셸 전투 등 역사적 배경은 노가레의 행적에 바탕을 뒀다고 한다. 이 정도면 가문의 기록이 부럽지 않을 듯하다. 게다가 그는 오드리 헵번의 조상이란다.

보르도 지도를 펼쳐보면, 가론강과 지롱드강이 포도밭을 사이에 두고 흐른다. 두 강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예의 메독 지구와 그라브 지구가 있다. 두 지역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품종으로 와인을 만든다. 강 오른쪽의 생테밀리옹 지구와 포므롤 지구는 메를로를 주품종으로 와인을 빚는다.

■카베르네 소비뇽 ‘혼종의 품격’

먼저 그 유명한 카베르네 소비뇽 이야기를 해보자. 이 품종은 메독 지구가 탄생할 즈음인 17세기에 와인의 역사에 등장했다. 워낙 광범위하게 재배되는 품종이라 유전자가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 역사가 굉장히 오래됐을 것이라 여겨졌다.

1990년대 말 와인 양조학으로 유명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포도의 유전자 검사를 시행했다. 이때 카베르네 소비뇽의 부모 품종이 밝혀졌다. 보르도 일대에서 자라는 카베르네 프랑과 루아르가 원산지인 소비뇽 블랑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17세기에 이 두 품종이 포도밭에서 사랑을 나눠 카베르네 소비뇽이 탄생한 것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과연 메독 맞춤형 품종이었다. 자갈이 많은 메독의 테루아르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진한 색과 탄탄한 타닌, 적당히 높은 산도에 검붉은 베리류의 아로마를 풍부하게 지녔으니, 진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당시 보르도 와인 산업을 쥐락펴락하던 네덜란드인과 그들이 거래하던 영국과 북유럽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등장한 시기를 보면, 17세기 중반까지 샤토 오브리옹에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메독과 함께 카베르네 소비뇽이 탄생한 이후부터나 오브리옹에도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 품종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카베르네 소비뇽 자체도 17세기의 품종과 오늘날의 품종은 많이 다르다. 와인 생산자들은 포도나무가 대를 거듭하는 동안 테루아르에 맞게 진화된 클론(형질이 같은 나무의 변종)을 골라 심기 때문이다. 같은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와인이라 해도 보르도, 캘리포니아, 칠레, 오스트레일리아 등 산지에 따라 와인 특징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르도 품종을 대표하는 메를로도 유전자가 밝혀졌다. 이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절반은 혈통이 같다. 카베르네 프랑과 프랑스 토착 품종인 마들렌 누아 데 샤렝트(Magdeleine Noire des Charentes)의 교배종이기 때문이다. 메를로에 관한 최초 기록은 보르도 관료가 남긴 문서에서 발견됐다. 리브른에서 메를로로 만든 1784년산 와인이 훌륭하다는 내용이었다. 보르도가 원산지인 메를로는 열매를 빨리 맺고 잘 익는다. 적당한 산도에 부드러운 질감과 묵직한 보디감을 지닌 까닭에 흔히 카베르네 소비뇽을 뼈대로, 메를로를 살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거 보르도에는 메를로에 필적하는 품종이 있었으니 바로 남서부가 고향인 말벡이다. 1950년대 프랑스를 덮친 냉해 탓에 프랑스 대부분의 지방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말벡은 부모 품종 한쪽이 메를로와 같다. 바로 마들렌 누아 데 샤랑트 품종으로 프랑스 남서부 가이야크가 원산지인 프루넬라(prunelard) 품종과의 교배종이다. 말벡은 그야말로 ‘기록적인’ 냉해 탓에 자신의 자리를 메를로에 내어주고 말았다. 지금은 아르헨티나 와인의 대표 품종으로 이름을 떨치지만 보르도에서는 블렌딩용으로 소량 재배된다.

보르도 와인에 블렌딩되는 또 다른 품종인 프티 베르도는 피레네 산맥 인근이 원산지이고, 카르메네르는 카베르네 프랑과 그로 카베르네의 교배종이다. 지금은 칠레의 대표 품종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동안 칠레에서는 메를로라고 오인되기도 했다.

화이트 품종인 소비뇽 블랑은 루아르, 세미용은 소테른, 뮈스카델은 보르도가 원산지다. 덧붙이자면 소테른은 자타 공인 스위트 와인 명산지다. 17세기 네덜란드 와인 상인들의 니즈에 맞추기 위해 메독 와인과 함께 등장한 와인이다.

■카베르네 프랑? 중세 최고 와인의 뿌리는

다시 서두의 궁금증으로 돌아가 보자. 보르도에서는 17세기 중반까지 어떤 품종으로 와인을 빚었을까. 당시 최고급 와인이었던 샤토 오브리옹의 주품종은 무엇이었을까. 보르도의 역사를 훑었지만, 답은 ‘정확히 모른다’이다. 하지만 품종별 유전자가 세세히 밝혀질 머지않은 미래에는 그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다만 지금까지 밝혀진 포도 유전자를 토대로 조심스럽게 유추해보자면,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르메네르의 공통 조상 품종인 카베르네 프랑을 주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지 않았을까. 여기에 지금도 존재하거나, 어쩌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품종들을 블렌딩해서.

당시 보르도 포도밭에 어떤 품종이 나고 자랐을지, 그때의 와인 맛은 어땠을지 필자 역시 궁금하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와인을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포도의 유전자를 통해 여전히 추측할 뿐이다. 콧속으로 번지는 향과 입안을 풍성하게 점령한 맛을 상상하면서.

<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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