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걸의 필동멘션 - 내가 한국인이 될 때
어렸을 때는 내 자신, 한국 사람이라는 것에 별 감흥이 없었다. 딱히 자랑스럽게 여긴 적도 없으나 누추하게 생각한 적도 없다. 오직 외국어 하나 배우는 데도 전 생애를 걸어야 하는 세계사의 변방이라는 생각만이 아쉬웠다.
이 비좁은 땅에 불평등과 불공평이 짝을 지어 휘몰아칠 때마다 주어진 시민의 의무에 성실하였으나 보상받지 못했던 친구들은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했다. 헤밍웨이처럼 포스트 모더니즘 국외이주자가 되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화가 나 주민등록증을 불태워 버리려 했던 친구는 여전히 서울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타지에서 국가와 민족으로 분류되는 순간만큼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진실에 불이 붙는다. 누구에겐 겨울 비행기 안에서 멜라토닌과 진토닉을 털어 넣고 열 시간 뒤 시드니의 여름 속에서 깨어나는 게 하나의 탈출이겠지만, 나에겐 애국심이라는 항로를 따라가는 선언과 같았다.
나는 이런 얼굴로 태어난 것에 아쉬움은 없다. 신체적으로 문화적으로. 심지어 독특한 자아의 형태로도. 좋아할 순 없어도 존중은 한달까. 그러나 백인을 인류의 대표로 보는 문화권에 발을 디디는 순간 외국인끼리의 긴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교묘하게 드러났다.
아직 잡지를 만들던 그때, 파리에서는 전 세계 ‘지큐’ 편집장들을 위한 파티가 있었다. 그해 겨울의 파티는 ‘영국 지큐’에서 마련했다. 미슐랭 스리스타로 휘황한 레스토랑은 시내 공원으로 연결되는 1930년대 바우하우스풍 건물을 불 밝히고 있었다.
열세 개 나라 지큐 편집장들은 올림픽도 아닌데 국가적 자긍심을 어깨에 매단 채 곧추 선 목으로 앉아 있었다. ‘영국 지큐’ 발행인과 영국인 칼럼니스트 외에는 모두 홀로 전장에 나온 상태였다. 레시피만으로 사전을 만들 만큼 현란한 메뉴의 리듬 속에서 와인이 몇 순배 돌아갔다.
탐색의 시간이란 언제나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레어 스테이크로 헤모글로빈 잔치를 벌일 준비를 했다. 곧 스파크를 일으키는 찰나에 대비하기 위해. 그때 독일 지큐 편집장이 말을 걸었다. “충. ‘지큐 코리아’는 정말 불가능이 없더라. 볼 때마다 너무 놀라워.”
그 순간, 나의 위악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 나 ‘독일 지큐’ 안 봐.”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그가 내 농담을 농담 자체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주황색 열기가 레스토랑에 퍼졌다. 견제하며 파안대소하거나 모공부터 으스대는 사람들은 애초에 세계주의자가 되긴 글러 보였다. 그때 술이 오른 귓바퀴로 불은 국수 다발 끊기듯 뜨문뜨문 이야기가 들렸다. 음절마다 꺾이는 영국 영어 악센트는 칼럼니스트의 둘도 없는 자존심 같았다.
“인구 6,000만 명인 나라를 소규모 회사인 양 자기들이 다 해결하겠다는 게 말이 돼?”
“지금까지는 엘리트들이 하라는 대로 했지만 민족주의로 돌아가려는 경향은 못 봐주겠어. 9·11 이전엔 어땠는지 생각도 안 나. 미국이 폐쇄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잖아.”
“후세인이 이란과 넌덜머리 나게 싸우던 80년대 전부를 미국 정부가 후세인에게 낭비했다는 건 완전히 난센스야.”
“올리버 스톤과 헨리 키신저도 완전히 일조했지.”
패션 잡지 파티라고 EU 가입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란 법은 없겠으나, 솔직히 졸렸다. 한순간 내 눈이 번쩍 하고 떠졌다. 크림 브뤼와 푸딩이 나왔기 때문에. 내가 반색하며 포크를 집어 들자 칼럼니스트가 비위 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가격이 비싸면 더 잘 산다며?”
뭐야? 내가 자기 얘기 안 들어서 기분 나쁘다는 거야? ‘뜬금없기 경연대회’에서 일등 할 소리나 하고.
“너희 나라 사람은 싸기만 하면 무조건 다 사?”
“그렇게 돈 많은 데도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고아 입양 많이 하는 나라잖아?”
눈꺼풀이 처진 안검하수 눈을 보니 오히려 술이 깼다.
“세상은 당신처럼 모순 투성이니까.”
“한국은 또 세계에서 공직자 부패가 제일 심각한 나라 아냐? 노태우 때는 정말 굉장했었지.”
푸딩에서 말라비틀어진 맛이 났다. 나는 극단주의에 성깔 하나로 맞서는 농부가 되었다.
“’제일 심각한’이라고? 네가 전 세계 242개 국가 다 가 봤어? 티베트가 아닌 다음에야 문제없는 나라가 어디 있어? 너희 정부도 네가 모르는 부패가 한국 백 배도 넘을 걸?
그러자 그가 이야기의 국경을 넘었다.
“세상에서 제일 못 입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중국인하고 한국인들이야. 네가 아무리 차려 입어 봤자 프랑스에선 관광객이나 추방된 히피 취급받을 걸?”
나는 못 생긴 백인 우월주의자의 입을 보며 서둘러 문장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아무리 못 생긴 것도 네 얼굴보단 나아. 그리고 누구 비난할 땐 구강청결제 좀 하고 해. 입 냄새 너무 나.”
그건 유머러스한 난타전이었을까, 습한 멸시로 상대를 뭉개던 공성전이었을까. 아무도 이야기가 적대적이라는 걸 몰랐다. 서로 생글거리면서 이죽거렸기 때문에.
그날 알았다. 나라의 뿌리는 물리적이기보다는 애국심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평소엔 동족애의 촉수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는 월드컵 응원 같은 걸 그렇게 불편해하더니 거기선 나라에서 제일 가는 애국자가 되었다니.
한 친구는 미국에서 집을 살 때, 에티오피아계나 몽골계에게 팔면 안 된다고 명시한 주(州)의 재산 소유 제한 법률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리 미국에서 오래 살고 행동 양식이며 외모까지 닮아도 그들 속에 속할 수 없었다고. 하긴 흔한 일이다.
1997년 뉴욕의 그리스인 동네에서 이모처럼 친절하던 이들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바로 낯빛을 바꾸었지. 그때 나는 그 할머니가 갑자기 식중독에 걸린 줄만 알았다. 어떤 구역에선 영어에 서툰 외국인도 구분했다. 영어를 못하는 부자 나라 사람에겐 외국인이니까 당연하다 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영어도 못하면서 여긴 왜 와?” 하는 식. 가난한 나라 국민의 얼굴에 덮인 인종차별의 추억은 그렇게 타 민족과 공유되었다.
예전에는 나의 국적을 알아맞히는 외국인이 드물었다. 제일 많이 들은 건 일본 사람. 그다음이 홍콩 사람. 내가 한국인의 특징적인 광대뼈에 외꺼풀 눈이 아니고, 한쪽은 쌍꺼풀, 한쪽은 외꺼풀, 짝짝이이긴 했지만, 퉁퉁한 볼 때문에 홍금보 얼굴로 보이는 건 조금 억울했다. 베이징의 한 백화점에서 일본인 직원이 “당신, 나보다 더 나고야 사람 같아요”라고 했을 땐 정말 당황했었다.
나의 것으로 선언한 민족성은 내 얼굴과 상충되지 않는데 이것이 나를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가 아니라니. 그전까지는 오직 미학의 관점에서만 신체적 갈등을 느꼈다. 간밤에 술을 너무 마셔서 복어처럼 동그래진 얼굴이라거나.
조상을 잘 알아야 한다고 강요받던 시절이 있었다. 어머니는 목사였던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그가 한 지역 목사로서 가졌던 반목과 개척자로서의 작은 기쁨에 대해, 그리고 인색하기 짝이 없던 성품에 대해. 어머니는 태어난 순서와 부계며 모계의 분류에 따라 호칭이 다르다는 것도 가르쳐주셨다. 친척들과 찍은 사진에는 죄다 목탄처럼 까만 머리와 적당히 그을린 피부, 더욱 강렬한 동족의 표상이 감광되어 있었다.
모두가 가족 간의 서사와 규율에 뿌리박힌 채. 내가 우리 가계도의 어디쯤에 들어맞는지는 나도 알았다. 내가 아무리 머리털을 옥수수 수염 빛깔로 물들이고 파라과이에서 산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할아버지 이호달의 손자이며 모친 이남규의 아들인 것을.
우리는 고향을 떠나 쿠바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던 증조 할아버지 시절로부터 아주 멀리 와 있다. 인종 간 혼인법의 역사와, 좋아하면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게 된 타국의 판례는 결국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은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나의 문화적 배경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격이 그런 것처럼 모습도 바뀐다. 얼굴은 정적인 가면인 동시에 전시되기 위한 도구니까. 어쩌면 10년 뒤에는 얼굴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순 없을 것이다.
이런 문화 혼합은 진작에 있었다. 타이거 우즈(흑인계, 코카서스계, 미국 인디언계, 아시아계), 키아누 리브스(코카서스계, 아시아계, 하와이안계), 머라이어 캐리(흑인계, 베네수엘라계, 코카서스계)는 배척받는 일 없이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한쪽에 너무 동화되거나 양쪽 인종의 상징이 되는 대신 인종적,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보였을 뿐이다.
가끔 마을 사람들이 내 얼굴과 옷차림을 보며 서로의 신체적 유사점을 찾던 인도 여행이 생각난다. 나를 둘러싼 채 내 팔을 만져본 아이들은 피부 촉감이 같다는 걸 알고 자기들 팔도 꼬집었다. 같은 사지(四肢)를 가졌다는 걸 확인하려는 듯 내 다리를 만져본 아이도 있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동질감으로 내 손을 자기 얼굴에 대보고 다시 내 뺨을 만졌다. 우리 모습이 언제나 우리 이야기를 말해주는 건 아니지만 그때처럼 내가 누군지 수긍했던 때가 없었다. 나는 비신화적이고도 충실한 정보로 채워진 얼굴뿐만 아니라 내 마음 그 자체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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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