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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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모있는 ‘와인의 언박싱’

2021-09-01 (수) 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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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실의 역사 속 와인 - 와인 언코르크

‘언박싱’은 구입한 물건을 개봉하는 일을 의미한다. 와인에도 이와 비슷한 용어가 있다. 바로‘언코르크’다. 코르크스크루라는 도구로 병에서 코르크 마개를 빼는 일을 뜻한다.

요즘은 간편한 마개도 많이 쓴다. 손으로 돌려 따는 스크루 캡이나 탄산음료에 주로 사용하는 왕관 마개가 대표적이다. 아예 유리병 대신 팩이나 캔, 호일, 페트병에 와인을 담기도 한다. 그래도 역시 전통적인 형태의‘소믈리에 나이프’로 코르크를 뽑을 때가 가장 멋지다. 와인 모임에서는 대개 좋은 와인일수록 경험이 많은 사람이 언코르크를 한다. 소믈리에 나이프로 능숙하게 코르크를 뽑아내는 모습은 흡사 마술쇼만큼이나 흥미롭다. 특히 삭아서 부스러질 수도 있는 올드 빈티지 와인의 코르크를 완벽하게 뽑아내는 일은 가히 예술에 가깝다.

■와인병, 코르크 마개, 코르크스크루 ‘언코르크 삼총사’


이처럼 둘러앉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언코르크에는 꼭 필요한 세 가지가 있다. 바로 와인병, 코르크 마개, 코르크스크루다. 이들 ‘언코르크 삼총사’는 17세기에 이르러 세상에 등장한다. 그전까지는 그야말로 악전고투 속에서 와인이 유통됐다.

와인은 당연하게도 액체다. 액체는 담는 용기가 꼭 있어야 한다. 알코올 성분 덕분에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지만 공기에 노출되면 금방 산화되기 일쑤다. 더불어 막는 도구와 마개를 여는 도구도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과정이 와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의 ‘박싱’ 방법은

고대에는 와인을 흙으로 빚어 구운 돌륨, 암포라, 피토스 등 거대 항아리에 담아 보관했다. 그러다 나무로 통을 만들 수 있게 되자 곧 나무통이 대세가 됐다. 그런데도 산화를 늦추기 위해 올리브유를 와인 위에 부어 공기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거나 송진이나 밀랍을 용기의 안쪽에 바르기도 했다.

와인을 옮길 때는 밑이 뾰족하고 기다란 암포라를 썼다. 두 사람이 들 수 있도록 암포라 양쪽에는 손잡이가 달렸다. 입구는 코르크나 나무로 덮고 빈틈은 송진을 발라 막았다. 이때 사용한 코르크는 오늘날의 코르크 마개가 아니라, 단순한 덮개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러다 나무통이 등장한 뒤로는 운반 용기도 점차 나무통으로 바뀌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동물 내장이나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 와인을 담았다. 가죽 부대는 여러 번 사용하면 탄성이 준다. 새로 만든 와인에서는 탄산가스가 올라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가죽 부대가 약하면 터질 수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까닭이다.

■불어서 만든 유리, 신라 고분서도 발견


유리병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인 기원전 1500년경 테베(현 룩소르)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그곳에서 만든 향유병이 발견됐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통치하던 기원전 27년에서 기원후 14년 사이에는 쇠 대롱으로 유리에 바람을 불어서 만든(blowing) 유리병이 로마제국에 등장한다. 시리아 장인들로부터 시작된 이 기법은 이후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블로잉’ 기법으로 만든 초기의 유리병은 두께가 얇고 강도가 약했다. 일일이 불어서 만들다 보니 귀할 수밖에 없어 유리병을 생활용품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지배계급의 식탁에 와인을 담아 서빙하는 주전자(저그) 정도로 활용될 뿐이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유리 제조 기술이 동로마제국과 사산조페르시아로 이어졌고, 기술은 더욱 발전해 화려한 유리병과 유리잔이 만들어졌다.

재미있게도 신라 고분에서도 유리 유물(로만글라스와 사산글라스)이 출토됐다. 조각을 복원한 유물은 모양과 장식이 무척 세련됐다. 이들 유물이 발견된 고분은 5~6세기경에 조성됐다고 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11세기부터는 베네치아가 유리 가공의 중심지로 떠올랐다(이보다 앞선 7~8세기의 유리 공방 유적이 토르첼로와 무라노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블로잉한 유리병을 철판에 굴려서 원통을 만든 다음, 끝을 잘라내고 펴서 사각형 판유리를 대량 생산해 곳곳에 수출했고 13세기까지 그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게다가 그즈음 베네치아 상인이 개입한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그곳의 유리 장인들이 베네치아로 대거 이주해오면서 유리 공예 또한 꽃을 피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목재를 연료로 쓰다 보니 유리 강도가 여전히 약했다. 베네치아산 유리병은 아름답고 정교했지만 오늘날의 유리병처럼 단단하지 않아 와인을 담아 이동 용기로 사용하기에는 무리였다.

1633년에 이르러 단단한 유리병이 개발되었다. 영국에서 유리 공장을 운영하던 케넬름 딕비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해 화력을 높여 단단하고 두꺼운 유리병을 만들어낸 것이다.

초기의 이 유리병은 무겁고 두꺼웠으며 색깔도 무척 진했다.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납작하고 둥근 양파 모양이었다가 날씬한 형태로 바뀌는가 하면, 원형에서 사각형으로, 다시 원통형으로 진화했다.

■세금, 양 속이기$ 유리병의 장애물

그런데 단단한 유리병이 나왔음에도 유리병에 와인을 담아 유통할 수는 없었다. 병 모양과 용량이 제각각이라 양을 속이기 쉬운 탓이었다. 주점에서는 나무통에 든 와인을 반드시 인증받은 용량의 그릇에 따라 판매해야 했다.

게다가 세금도 유리병 유통을 가로막았다. 1696년부터 150년 동안 창문에 세금을 매겨 창문세(Window Tax)를 부과하더니, 1745년부터 100년 동안은 유리 제품에도 세금(Glass Tax)을 매겼다. 일종의 부유세였던 셈이다. 영국 상류층 사이에서는 유리병에 가문 문장이나 이름을 새긴, 소위 ‘영국 병’이 유행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영국에서는 케넬름 딕비가 단단한 유리병을 만든 지 200여 년 뒤인 1860년에야 유리병에 와인을 담아 유통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가된다.

한편 프랑스에서도 양을 속이거나 위조를 염려해 와인을 유리병에 담아 파는 일이 한동안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곧 프랑스는 영국 병의 장점을 알아챘다. 1723년에 보르도의 오크통 제조업자 피에르 미셸(Pierre Michel)이 공장을 세워 유리병을 생산한다. 오늘날 각진 어깨 형태의 보르도 스타일 와인병이 그에게서 비롯했다.

■샴페인의 압력, 숙제를 풀어라

1728년이 되자 드디어 병에 와인을 담아 팔 수 있었다. 샹파뉴 생산자들이 루이 15세에게 유리병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강력하게 건의한 결과였다. 거품이 생명인 샴페인은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병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리병 기술이 발전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용량이 일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5~6기압이나 되는 샴페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병이 터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샴페인 생산자인 모엣과 마담 클리코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고, 이들의 불만 덕분에 와인병이 규격화되고 더욱더 단단하게 개선됐다.

유리병이 보급되자 날이 갈수록 병 수요가 늘었다. 1821년 브리스틀의 헨리 리케츠(Henry Ricketts)가 일정한 모양과 크기의 주형틀에 액체 유리를 부어 병을 만드는 방법으로 특허를 받는다. 대량생산의 길이 열린 것이다.

유리병 보급 초기에는 와인 생산자가 오크통째 네고시앙(중간 상인)에게 팔면, 네고시앙이 유리병에 와인을 담아 유통했다. 이때 다른 와인을 섞어 파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 탓에 샤토 라피트 로칠드 등 몇몇 와이너리에서는 ‘직접 병입’을 시도하다가 네고시앙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1920년 샤토 무통 로칠드의 필리프 남작이 1등급 샤토들에 ‘직접 병입’을 하자며 ‘5인 클럽’을 결성했다. 필리프 남작은 1924년 이를 실행에 옮기고 ‘샤토에서 직접 병입((Mis en bouteille au Chteau)’했음을 레이블에 표기했다. 20세기 들어서야 와인 생산자가 와인을 직접 병에 담아 유통하게 된 것이다.

■1979년에야 와인병 통일$ 코르크는 40년 이상 된 나무서

지금은 와인과 지역 특성에 맞게 병을 지역별로 통일해 사용한다. 와인병 용량은 1979년에 이르러 750ml로 통일됐다. 와인병 색깔은 로제와인 등을 제외하곤 주로 짙은 녹색이나 짙은 갈색이 선호된다.

곡절 끝에 와인병이 탄생했으니, 문제는 마개로 넘어갔다. 단단한 유리병이 등장한 초기에는 코르크를 사용하지 않았다. 나무 마개로 막고 헝겊으로 빈틈을 메우거나 기름 먹인 종이나 가죽으로 감쌌다. 제대로 밀봉될 리가 없었다. 그러다 코르크를 ‘재발견’한 것이다.

코르크는 수령이 40년 이상 된 코르크나무로 만든다. 나무껍질을 벗겨 건조한 뒤 뜨거운 물이나 수증기, 고주파로 살균하여 만든다. 특이하게도 코르크나무는 껍질을 벗긴 뒤 10년 정도 지나면 다시 껍질이 생긴다. 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자라는데 평균 수령이 300년이나 된다.

앞서 언급했지만, 코르크는 고대 그리스에서 암포라 마개로도 사용됐다. 물론 오늘날의 코르크 마개처럼 그 특유의 성질을 이용하지는 못했다. 코르크는 탄성과 유연성이 좋아 병을 막기가 용이하다. 또 병을 눕히면 와인에 코르크가 젖으면서 팽창해 공기가 거의 침투하지 못한다.

코르크의 유일한 단점은 코르크 오염, 즉 코르키(Corky) 또는 코르크드(Corked)다. 프랑스어로 ‘부쇼네’라고 한다. 원인 물질은 TCA(곰팡이가 염소 화합물 또는 페놀과 만나 합성되는 물질)이다. 코르키 와인에서는 오래된 젖은 신문지나 썩은 나무, 곰팡이 핀 습한 지하실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난다. 과거에는 평균 5% 정도였는데 지속적인 연구 덕분에 점점 줄고 있다. 최근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TCA는 코르크뿐만 아니라 오크통과 셀러를 세척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단단하게 박힌 코르크 어떻게 빼지?

그런데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단단하게 박힌 코르크를 어떻게 뺄 것인가! 사람들이 와인병 앞에서 고민했을 장면을 상상하다 보면, 코르크스크루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쩔쩔매던 필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필자는 결국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당시 사람들 역시 참으로 숱한 방법을 시도했을 것이다. 뜻밖에도 런던의 한 총포상에서 코르크스크루가 고안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로써 언코르크의 세 요소가 모두 갖춰졌다. 와인병과 코르크에 이어 코르크스크루까지 등장하자 마침내 와인을 장기 보관할 수 있었고, 마개를 쉽게 열어 와인을 즐길 수 있게 됐다. 특히 샴페인과 빈티지 포트와인은 병과 코르크 마개가 없었다면 탄생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이들 언코르크 삼총사는 와인의 역사를 더욱더 향긋하게 숙성시킨 주역임이 틀림없다. 와인 애호가들은 다르타냥이 되어 이들 삼총사와 어울려 와인을 즐기면 될 뿐.

<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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