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본의 한 대학이 외국인 유학생 유치를 위한 안내책자를 만든 후 구설수에 올랐다. 표지모델이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학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은 한국에서 온 학생들을 포함해 대부분 아시아 출신이었다. 특히 다수를 차지한 것은 중국 학생들. 캠퍼스에 들어가면 보이느니 아시안 얼굴이다. 그런데도 소수에 불과한 백인학생들 사진을 책자 표지에 올렸으니, 그 학교 사정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어색했다.
몇 되지도 않는 백인을 굳이 모델로 내세운 이유가 무엇일까. 필시 백인들이 유학 온다고 하면 학교가 좀 더 그럴듯해 보일 것 같은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인종차별의 결과다. 우리 동족인 재일교포들에게는 지독히도 차별적이면서 백인들에게는 너그럽기만 한 것이 보편적 일본인들의 정서다.
아시안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가 빈발하면서 인종차별 이야기가 한인들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다. “어느 동네에서 한인노인이 개 데리고 산책하다가 공격을 당했다더라” “모든 게 트럼프 때문이지, 코로나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스’니 ‘쿵 플루’니 하며 적대감을 조장했으니… ” “미국에 수십년 살아도 길거리에 나가면서 이렇게 신경 쓰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분위기가 이쯤 되자 은퇴한 한인들 중에는 역이민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케이스들도 있다. 이 나라에 사는 한 언제든 인종차별을 당할 수 있으니, 내 나라에 가서 피부색 같고 얼굴 모양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종차별의 피해자이기만 한 걸까. 인종차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한인/한국인이라는 지적들이 있다. 백인은 우대하면서 흑인이나 히스패닉, 동남아 출신 등 유색인종 무시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한인/한국인들이라는 지적이다.
앞의 일본대학 못지않게 한국에서도 백인 선호 정서가 강하다. 한국의 학원이나 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를 구할 때 인기 1위는 백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영어도 잘 하고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은 우리 2세들이 객관적으로 더 적격일 것 같지만 그건 우리 생각이다.
한국인들 생각으로는 백인 교사가 가르치면 더 전문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한국에서 장기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지면서 외국인들이 TV 프로그램에도 자주 등장하는 데, 출연자들을 보면 십중팔구 백인이다. 거리에서 백인들이 길을 물으면 그렇게도 친절한 한국 사람들이 동남아 사람 등 유색인들에게는 불친절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똬리를 튼 인종차별 탓이다.
동족을 ‘우리’로 이민족을 ‘그들’로 구분하며 ‘그들’을 경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적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경계심이 유전자에 각인된 결과이다. 그렇다면 백인이라는 ‘그들’에게는 왜 너그러운 걸까. 우리가 받은 교육의 영향이라고 본다.
19세기와 20세기 세계 각국은 서구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했다.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음악을 듣고, 그들의 과학 의학 정치 경제를 배웠다. 그러면서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것이 그들의 시각이다. 서구 백인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데 길이 들었고. 그중 하나가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다.
누구에게나 부인할 수 없는 인종적 편견이 있다. 그래서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인종차별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우리 안의 인종차별부터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