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하철역에 들어섰을 때였다. 플랫폼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데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터널 저편에서 열차 소리가 들려왔다. 배차 간격이 넓은 노선인지라 놓칠세라 계단을 힘껏 뛰어올랐다.
열차에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순간 화색이 돌았다. 말로만 들었던 경의중앙선 독서바람열차였다. 열차 안은 숲속 같았다. 곳곳에 나무 그림이 빼곡했고 바닥에는 ‘독서바람열차’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당연히 책도 있었다. 책꽂이를 둘러보다가 맨 위 칸에 표지가 정면으로 놓인 책이 눈에 들어왔다. 큼지막한 동화책이었다.‘크리스마스 휴전’.
크리스마스 휴전은 익히 알려졌듯 1차 세계대전 때 일어난 일이다. 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발칸반도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을 당하면서 비롯했다. 이 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세르비아의 우방인 러시아가 끼어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애초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부추긴 독일 또한 러시아와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와 프랑스를 상대해야 했던 독일은 먼저 프랑스를 치기 위해 프랑스로 가는 길목에 있던 중립국 벨기에에 침공했다. 벨기에와 사이가 좋았던 영국은, 중립국을 침범했다며 독일에 비난을 가하면서 전쟁에 뛰어들었다. 여기에 각국 식민지들까지 속속 참전했다.
도미노처럼 이어지던 선전포고는 곧 들불처럼 번져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그런데 독일이 프랑스로 향하는 길목엔 벨기에의 ‘이프르(Ypres)’란 지역이 있다. 이곳에서 독일군과 연합군이 대치하던 중에 일어난 ‘감동적인 사건’이 바로 크리스마스 휴전이다.
독일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이프르에서 참호전을 벌였다. 서부전선으로 배치된 프랑스-영국 연합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노맨스랜드(No man’s land)’를 사이에 두고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흡사 미로 같은 참호에 들어앉아 피 말리는 전투를 치렀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살풍경을 말하자면, 서부전선의 참호전이 자주 거론된다. 참호전이란 전선을 따라 파놓은 깊은 참호 안에 몸을 숨기고는 적군과 치르는 전투를 말한다. 참호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기의 성능이 발전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신무기인 기관총, 대포, 탱크, 전투기, 독가스 같은 무기의 위력이 어마어마했기에 병사들이 몸을 조금이라도 드러냈다가는 곧바로 표적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참호 속은 그야말로 처참함 그 자체였다. 플랑드르 지역에 속한 이곳의 토양은 진흙질인 탓에, 비가 내리면 물이 빠지지 않아 참호는 진흙탕이 됐다. 평소에도 습하고 축축해 온갖 벌레와 이와 쥐가 뒤끓었다. 당연히 전염병도 돌았다. 겨울은 더욱 더 끔찍했다. 악조건에 혹독한 추위까지 덮쳐 병사들은 동상이 걸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차에 1914년 12월 24일이 됐다. 크리스마스이브는 벽난로의 훈기가 도는 유럽의 가정집 거실에도 찾아오지만, 한바탕 전투를 치른 서부전선의 참호 속에도 찾아왔다. 프랑스-영국 동맹군과 독일군은 각자의 참호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전투식량과 보급품으로 크리스마스 식탁을 차려놓고 프랑스군은 와인을, 독일군은 맥주를, 영국군은 위스키를 꺼냈다. 저마다의 술로 목을 축이며 참혹함과 공포와 외로움과 증오를 덜어냈다. 무엇을 덮으려는지 참호 밖 노맨스랜드엔 희디흰 눈발이 흩날렸다.
한없이 적막한 밤. 어디선가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국군 참호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였다. 프랑스군의 진지에서도 독일군의 진지에서도 병사들은 모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친숙한 멜로디가 지친 병사들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영국군 진지의 노래가 끝나자 독일군 진지에서 한 병사가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래가 끝나자 영국군 병사들이 손뼉을 치며 앙코르를 외쳤다. 이번에는 영국군 병사들이 백파이프를 불기 시작했다. “참 반가운 성도여~.”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던 독일군 병사는 건너편 영국군 병사의 반주에 맞추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곧 크리스마스트리를 손에 들고 참호 밖으로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참호 밖으로 머리카락만 보여도 곧바로 총알이 빗발쳤을 터였다. 그날은 사위가 얼어붙은 노맨스랜드에 캐롤이 포근하게 내렸다.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노래가 끝난 뒤에도 아무도 그에게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
이윽고 독일, 영국, 프랑스 3국의 장교들이 모여 그날엔 전투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프랑스 장교는 얼른 진지로 뛰어가 샴페인을 가져왔다. 그들은 군용 식기에 샴페인을 따라 마시며 크리스마스 휴전을 위해 건배했다.
3국의 병사들도 노맨스랜드로 모여들었다. 서로에게 와인과 맥주, 위스키를 따라 주면서 초콜릿과 과자와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담배를 함께 피우면서 품 안에 간직한 가족사진을 함께 보며 그리움을 나눴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며 주소를 주고받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날 밤 진지로 돌아온 프랑스 장교는 “일지에 어떻게 적으시렵니까”라는 질문을 부하에게 받자, “오늘은 독일군의 적대 행위가 없었다”고 적겠다고 했다고 한다.
다음 날, 어김없이 날이 밝아왔다. 하지만, 그날은 여느 날과 달랐다. 3국의 병사들은 노맨스랜드에 흩어진 희생자들을 수습해 함께 장례를 치렀다. 축구도 하고 카드놀이도 했다. 영국인 군종 신부가 집전해 크리스마스 미사도 올렸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에선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군 장교에게 말한다. “오늘 포격이 있을 예정이니 우리 참호에 머무르십시오.” 얼마 뒤 프랑스군 장교도 독일군 장교에게 말한다. “오늘은 우리 쪽에서 포격을 할 예정이니 우리 참호에 머무르십시오.”
이날의 일은 병사들이 보낸 편지로 세상에 조금씩 알려졌다. 영국에서는 신문 1면에 이 사건이 보도되었다. 각국 사령부는 이 사건을 전해 듣고 이곳의 병사들을 철수 시켜 격전 지역으로 보냈다고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인 1914년 프랑스의 여름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그해 포도 농사는 대풍이었다. 포도 재배지의 젊은이들은 전쟁에 징집될 때만 해도 가을이 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 포도를 수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의 와인 생산자들 역시 전쟁이 금방 끝날 거라고 예상해 와인을 군병원에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은 지속됐다. 다만, 군병원에 보낸 선물 덕분에 랑그도크의 와인생산자들은 전쟁 내내 와인을 군납할 수 있었다. 실은 모든 참전국이 같은 판단을 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쟁은 4년간 이어졌고 수많은 병사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앞서, 노맨스랜드의 군인들은 ‘술을 나누며’ 크리스마스를 축복했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의 병사들은 술을 보급받지 않으니, 이 장면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테다. 사실 전시에 군인들에게 술을 배급하는 것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관행이다.
전쟁터의 물은 인간 배설물뿐만 아니라 전투 중 사망한 사람과 동물의 사체에 오염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적군이 우물이나 수원에 독약을 푸는 경우도 있었기에 물을 함부로 마실 수 없었다. 술은 물보다 안전한 수분 보충제였다. 또한 참혹한 전쟁의 공포를 덜어주고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도 술이 필요했다.
예의 영화를 보면 프랑스군 진지에는 와인이 비치된 장면이 나온다. 독일군과 영국군 참호에도 맥주와 럼 또는 위스키 같은 스피릿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1차 세계대전 때 배급된 술을 보면 각 나라를 대표하는 술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영국군은 일주일에 2회 럼을 배급했다. 참호에 있는 병사들에게는 배급량이 더 많았다. 날씨가 춥거나 훈련이 있는 날이거나 건강상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의무장교가 제한을 두지 않고 재량껏 배급했다고 한다. 독일군 역시 병사들에게 매일 상당량의 맥주와 와인을 배급했다. 러시아도 일주일에 3회 보드카를 배급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가장 많은 양의 술을 배급받았다. 매일 배급되는 와인이 1914년에는 0.25리터, 1916년에는 0.5리터였다고 한다. 더 마시고 싶은 병사들은 할인된 가격에 와인을 더 구입해 마실 수도 있었다. 매일 1리터의 와인을 마시는 게 합법적으로 허용되었다. 프랑스는 자국산 와인만으로는 부족했던 나머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에서 와인을 대거 수입해 군납할 정도였다.
한편, 전쟁의 불길이 치솟던 당시 민간에서는 금주운동이 한창이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에서는 음주가 전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고 한다. 참전국 대부분이 병사들에게 술을 배급한 사실을 보면 연구 결과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다.
전쟁은 결국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군의 일간지인 ‘전선의 메아리’에는 승리의 주역을 뛰어난 장교와 용감한 병사들 덕분이라고 보도했다. 와인의 나라답게, 이들에게 용기와 불굴의 담대함을 선물한 것은 ‘와인’이었다고 실토하면서 말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독서바람열차에서 내려 사무실에 도착한 필자는 곧바로 ‘크리스마스 휴전’ 책을 주문했다. 책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엔 마음이 조급했다. 크리스마스 휴전에 관한 자료를 찾아 읽고 영화도 봤다. 칼럼의 소재를 고민하던 차여서였을까. 필자의 눈에 그만 와인이 쏙 들어와 박혔다. 샴페인을 마시는 장교가 아니라 장교가 마시는 샴페인이, 와인을 마시는 병사들이 아니라 병사들이 마시는 와인이 말이다.
올해는 크리스마스에도 전 세계가 코로나19와 전쟁 중이리라.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지난한 이 전쟁의 끝을 위해 단 하루만이라도 마음이 안식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스크는 벗지 못하더라도 그날만큼은 따뜻한 눈빛을 서로 응시하며 바이러스가 통과하지 못하는 마스크를 뚫고 위로와 응원의 노래가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그날은 각자의 ‘참호’에서 다 함께 잔을 채우자. 안 그래도 각박한 인류의 자리가 ‘노휴먼랜드’가 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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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