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답의 산행길 걸으며 얻는 충만감

2020-08-28 (금) 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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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기 (2) Yucaipa Ridge Traverse (Galena to Little San Gorgonio)

미답의 산행길 걸으며 얻는 충만감

Yucaipa Ridge Route정경.

미답의 산행길 걸으며 얻는 충만감

East Camp 동쪽 Gully의 하산로.


미답의 산행길 걸으며 얻는 충만감

Headwall의 상단부 풍경.


Galena Peak정상의 소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행장을 차린다(12:11). 한국식 햇볕 차단용 마스크에 헬맷까지 착용한 Heidi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등 서로 농담을 나누며 West Galena로 걸음을 옮긴다. 이제부터는 Yucaipa Ridge의 고점을 따라 계속 서쪽으로 향하는 여정이 되고 보니, 불현듯 삼장법사와 함께 머나 먼 서역의 땅을 향하여 구도와 모험의 길을 가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그리고 한마리 백마의 ‘서유기’의 행로가 떠올려 지니, 나는 어쩌면 영낙없는 몽상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홀로 고소를 짓는다.

어쨌거나, 우리 앞에 어떤 험난한 역경이 놓여 있을지 불안해 지기도 한다. 간혹 아스라한 단애 아래로 보이는 Mill Creek 하상이 아찔한 현기증을 유발한다. 드문 드문 소나무들이 서있는 평탄한 능선을 10분쯤 걸으니 이내 West Galena Peak의 정상에 닿는다(12:20; 5.2마일; 9335’). 실제로는 이 Yucaipa Ridge의 최고봉이며, 수년 전에 한 번 올랐던 곳이다. 이 곳 정상에서는, 뱀처럼 구불거리며 10마일쯤에 걸쳐 흘러내리는 Mill Creek 하상의 경관은 물론, 구름 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이는 Mt. Baldy(10064’)와 그 주위 호위봉들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다시 ‘서유’의 행보에 나선다. 여기부턴 나로서는 전혀 가 본 일이 없는 길없는 길을 Jason과 Sunny를 등불 삼아 한 걸음씩 밟아 나간다. 따로 나있는 등산로는 물론 사람이 남긴 발자취의 흔적 조차도 아예 보이지 않는 중에 Lodgepole Pine, Limber Pine, Jeffrey Pine, Mountain Mahogany, Manzanita 들이 때로는 드문 드문, 때로는 빽빽히 자라나 있는 능선의 고점부위를 따라 걷는다. 이따금 능선의 고점이 오를 수 없는 암능이거나, 건널 수 없는 벼랑이거나, 전혀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칙칙한 수목이나 관목지대를 만나면 능선의 왼쪽 비탈 아래로 한 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오르는 행로를 반복한다.


비탈이 가팔라 오르고 내리기가 용이치 않으나, 치명적인 위험성은 없어 보이는 지형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고마운 심정이 된다. 능선의 한 걸음 또는 두 걸음 쯤의 오른쪽은 주로 끔찍 험악한 천길 낭떠러지로 이어지고는 있지만 왼쪽은 웬만큼 여유가 있다. 때로 급경사면의 푸석한 흙비탈에 크고 작은 돌덩이 바위덩이들이 섞여있어 몸이 미끌어지지 않고 또 낙석이 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을 옮긴다. 간혹 아래쪽에 있는 멤버가 낙석으로부터 안전한 위치로 옮겨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려 가기도 하고, 반대로 기다렸다가 오르기도 한다.

오랜 세월의 거친 풍상에 시달리며 기묘한 형상으로 뒤틀린 커다란 Juniper Tree 아래를 지나고, 영겁의 시간을 지나며 부단한 풍화작용으로 날카롭게 쪼개지고 부서지고 삭아가는 집채만한 바위 아래를 지난다.

‘9164’ 봉’으로 불리는 바위투성이 봉우리에 올라선다(13:20; 5.8마일; 9164’). 제대로 쉬어 본 일이 없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왔으나, West Galena Peak으로 부터 0.6마일을 온 여정에 정확히 1시간이 걸렸으니, 그만큼 만만치 않은 구간을 지나 왔다는 증좌가 되겠다.

계속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는 전방의 산줄기를 살피니, 가까이로는 약간 왼쪽으로 굽으며 중첩된 3개의 봉우리가 있고, 그 뒤쪽은 병풍처럼 오른쪽 뒤로 비스듬히 펼쳐지며 잔잔하게 벋어 내리는 형국이다. 가늠컨대, 아마도 맨 가까이로 남쪽 기슭이 마치 잔디가 깔린 듯, 초록빛 관목으로 덮여있는 봉우리가 Cuchillo Peak(8868’)이고, 두 번째가 Wanat Peak(9056’), 세 번째의 더 높고 더 뾰쪽한 봉우리가 Little San Gorgonio Peak(9133’)일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여정을 계속한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뒤의 ‘Bump 9164’ 정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자잔한 돌출봉들이 제 각각 자기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의 발길을 붙든다. 다시 능선을 따라 위 아래로 오르고 내리며, 때로는 왼쪽 비탈을 내리고 오르며 나아간다. 다소 아슬 아슬한 구간이 없진 않으나,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뒤를 돌아보니 뾰쬭한 세모꼴의 ‘9164’봉’이 찌를 듯 날카롭고 거칠어, 과연 내가 저 봉우리를 통과한 것이 맞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윽고 Cuchillo Peak에 닿는다(14:45; 6.8마일; 8868’). ‘9164’봉’으로 부터 1마일의 행정이었는데 85분이 걸렸으니, 이 역시 험난한 구간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정상부는 ‘9164’봉’ 쪽에서 바라보았던 것 처럼 키큰 소나무들이 듬성 듬성 서있는 사이로 Manzanita, Buckthorn이 비교적 평탄한 지면을 덮고 있는 정경이다. 여기까지의 험악한 노정 중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작은 쉼터인양 자못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다시 우리 5인의 ‘서유’의 행렬은 계속된다. 지금까지의 산세와 유사하지만, 주능선의 고점에서 비탈면을 아래로 내려가고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는 그런 일은 별로 없는데, 주능선 고점에 바위들이 많고, 이 바위들이 손으로 잡으면 쉽게 부서져 내릴만한 그런 미덥지 않은 상황이라 진행이 더디고, 때로는 늘어진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가노라니 체력의 소모도 많다.


아직 쌩쌩해 보이는 젊은 일행에 비해 나는 특히 기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로 힘겹게 Wanat Peak에 오른다(15:59; 7.6마일; 9056’). Cuchillo 부터 0.8마일의 행보에 74분이 소요되었는데, 역시 노정이 험했던 이유도 있겠으나, 고갈된 체력으로 인한 나의 부진이 지체의 적잖은 요인도 되는 듯 하다. 정상등록부가 있어 이름을 남긴다. 최근의 산행기록으로는 작년 8월과 11월에 각각 2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지난 해 산행을 한 Sierra Club멤버들은 이름을 적지 않았나 보다.

이제 마지막 목표인 Little San Gorgonio Peak이 남았다. 다시 서둘러 길을 떠난다. 멤버들의 행보가 나로 인해 조금씩 지체되는 상황이라, 내 발걸음 못지 않게 내 마음도 무겁다. 바로 눈 앞으로 Little San Gorgonio Peak의 세모꼴 자태가 확연한데, 북쪽으로 골을 지어 흘러내리는 Gully마다 아직 덜 녹아 쌓여 있는 잔설들이 희끗 희끗 드러나 있다.
나아가는 능선의 형국이 다행스럽게도 차츰 고도를 낮추어 가는 모양새라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마침내Little SG Peak아래의 Saddle에 도착하게 된다(16:35; 8.0마일; 8550’; 4628’ Gain). Wanat Peak으로 부터 0.4마일을 오는데 36분이 걸렸다. 이곳 Saddle부터는 과거에 2번을 통과한 일이 있었기에 우선 반가운 마음이 앞서며 크게 안심이 된다.

목적지인 Little SG Peak까지는 이제 0.4마일이라는 멀지 않은 곳이지만, 난 이 곳에서 산행을 중단해야겠다 마음 먹는다. 나는 이 코스로 Little SG Peak을 두 번 올랐었고, 우리 일행이 오늘 이 Little SG Peak을 오르고 나면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와서 하산해야 하므로, 나는 여기에서 일행을 기다리겠다며, 리더인 Jason에게 양해를 구한다. 마지막인 이 봉우리를 오르는 데는 0.4마일에 600’라는 만만치 않은 고도를 올라야 하는데, 내가 동행한다면 산행시간이 얼마간 더 지체될 것이 예상되고, 또 급경사구간의 하산여정이 아직 많이 남았기로 한 동안 쉬면서 기력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4인의 멤버들이 Little SG Peak을 향해 떠나고, 나는 바위에 홀로 앉아 휴식을 취하며, 오늘 여기까지의 Yucaipa Ridge구간의 산행을 음미한다. Galena Peak에서 이곳까지 3.1마일의 거리가 되는데, 4시간 24분, 즉 264분이 걸렸으니, 마일당 85분이 걸리고, 시간당 0.7마일을 이동한 행보였다. 결코 만만치 않은 루트였음이 자명하다.

작년의 Triplet Rocks 구간의 산행과 비교하면, Twin Peaks(East)로 부터 Triplet Rocks까지 3.2마일의 거리에 편도 7시간, 왕복 14시간이 걸렸었으니, 마일당 131분이 걸렸고, 시간당 0.46마일의 행보였다. 수치상으로 보니, Triplet Rocks의 산행이 훨씬 더 더디었음을 알겠다. 이런 계산을 하노라니, 생각보다 빨리 일행이 Saddle로 되돌아 온다(17:14, 8.8마일; 8550’). 쉽지 않은 경사길 왕복 0.8마일의 산행에39분이 걸렸으니, 과연 내가 빠지기 잘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이렇게 Saddle에서 다시 모인 우리들은 어려운 구간의 산행을 잘 마쳤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하산을 서둘러, 이윽고 등산시작점인 Vivian Creek Trailhead Parking에 무사히 도착한다(19:18; 11.4마일; 6080’; 5069’ Gain). 주차장에 들어설 때는, 마치 멀고 긴 여행을 끝내고 오랫만에 고향집을 찾아오는 듯한 안도감 편안함 푸근함이 느껴진다.

반추컨대, 나는 이 Yucaipa Ridge의 2.8마일 미답구간(West Galena ~ Saddle)을 마침내 오늘 답파함으로써, 내 마음속에 비어있던 Puzzle조각 하나를 마저 채운 셈이 된다. 비록 이 Ridge를 일거에 답파한 것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기꺼이 만족한다. 이로써 나는 남가주에서의 등산에 관한 나의 소박한 Bucket List의 내용을 다 실천해냈다는 성취감 충만감과 함께, 이제부터는 불과 11마일에12시간씩이나 걸리는 이런 류의 신산험난한 산행에 나서는 일은 삼가야 할 체력이고 연령이라는 것을, 섭섭하지만 후련한 심정으로 명심한다.

이 힘든 등산을 함께 한 일행 모두가 다 자랑스럽다. 특히, 지난 날 여러 해에 걸쳐, 수많은 유명 난코스의 산행을 같이 함으로써, 내 소박한 산행이력의 지평을 다소나마 확장시켜 준 소중한 후배 Jason과 Sunny에게 심심한 고마움을 표하며, 나의 이 난삽한 산행기가 행여 어느 한인 열성 산꾼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310-259-6022
http://blog.daum.net/yosanyosooo

<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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