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재의 세심한 맛 - 완두콩
짭짤하게 찌어내면 맥주와 단짝 돼지고기·소시지와도 좋은 조합
▶ 베이컨과 차례로 볶은 후 육수, 걸쭉한 ‘완두콩 수프’ 요리 완성
깍지째 먹든 콩알만 발라 먹든…불안한 봄날의 기분 씻어줄 별미
자장이냐 짬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탕수육의‘부먹(소스를 부어먹기)’ 및‘찍먹’(찍어먹기)의 선택과 더불어 우리에게 매우 큰 의미를 지닌 문제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단 한 번도 이 사안의 심각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난 사십 몇 년을 살아왔다. 나에게 중국집의‘식사’란 언제나 어디서나 볶음밥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며 자장면의 지분이 차츰 늘어 결국은 양자택일을 놓고 고민하는 팔자가 되어 버리기는 했다. 하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터럭만큼도 고민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완두콩 때문이었다.
완두콩에 이끌려 볶음밥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새로 이사간 아파트의 상가 2층에는 중국집이 있었다. 따뜻한 차를 내주는 등, 아파트 주민만을 상대로 하는 곳치고는 약간의 격식이 배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볶음밥에는 언제나 완두콩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래 봐야 주방 쪽 선반에 잔뜩 쌓인 통조림에서 나온 것이었겠지만, 그 바깥의 세계를 모르는 초등학교 2학년에게는 충분했다.
그리고 2년 뒤, 깨달음이 찾아왔다. 계기는 어머니가 구독했던 여성지의 부록이었다. 이제 제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살림 요령 사전’과 비슷했으니, 조리를 비롯한 가사의 요령을 간추려 담은 핸드북이었다. ‘콩알에 직접 간을 할 수 없으므로 완두콩을 찔 때는 깍지에 넉넉하게 소금을 뿌려야 맛있다’라는 항목을 읽고는 알았다. 그렇게 큰 깡통에 담긴 완두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음식에 호기심이 많았던 어린이였던 나는 핸드북을 들이밀며 완두콩을, 깍지에 소금을 넉넉하게 뿌려 쪄 먹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바람은 약 75%만 이루어졌다. 찐 완두콩이 밥상에 올라오기는 했지만 깍지에 소금간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식은 최대한 싱겁게’라는 가풍 탓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먹어왔던 덕에 ‘소금을 넉넉하게 뿌려’라는 문구는 여태까지 잊히지 않고 매년 봄마다 나를 이끈다. 이제 콩을 대부분 까서 팔고 완두콩도 예외가 아니기에, 오히려 깍지째 파는 것을 사려면 발품을 약간 팔아야 한다. 전통 시장을 딱히 선호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완두콩만은 내 필요에 맞는 것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 초록색의 깍지가 잔뜩 담긴 망이 눈에 들어올 때 나는 조금 안심한다. 올 봄에도 이렇게 완두콩을 먹고 지나갈 수 있겠구나. 다행이다.
■싱그러움이 깃든 찐 완두콩
깍지까지 입에 넣어야 하므로 완두콩은 최대한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싱크대에 물을 받고 과채세척제를 풀어 완두콩을 충분히 담갔다가 헹군다. 아니, 그런데 굳이 깍지를 입에 넣고 까먹어야 하나요? 품격 떨어지게. 누군가는 그렇게 합리적인 회의를 품을 수도 있다.
또한 영 내키지 않는다면 그저 손으로 한 깍지씩 까서 먹어도 그만이다. 꼭지 쪽의 끝을 엄지와 검지로 꾹 눌러 떼어낸 뒤 등쪽으로 잡아 내리면 실을 당겨 소포 봉투를 열듯 깍지가 갈라지며 콩알이 드러난다. 한 알씩 집어 먹든, 아니면 입을 벌리고 털어 넣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찐 완두콩이 공기 하나쯤의 분량이라면 이처럼 차분하게 한 깍지씩 까먹어도 상관 없다. 어쩌면 그렇게 먹어야만 각 콩알의 맛을 최대한 음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봄은 짧고 완두콩은 잠깐 스치고 지나가니 눈에 띌 때 한 자루씩 사다가 찐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깍지씩 집어 먹어서는 감질 날뿐더러 콩알을 발라내다가 지쳐 먹는 재미를 빼앗겨 버릴 수도 있다.
여기까지 고려했다면 품격쯤은 살짝 밀어두고 좀 더 편하게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잘 씻은 콩깍지를 체에 밭쳐 물기를 적당히 털어내고 찜기에 담는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접이식 찜기보다 대나무 찜기가 좀 더 다루기 편하다.
한 자루를 샀다면 찜통이 두 층은 필요할 것이다. 냄비에 물을 자박하게 담아 끓기 시작하면 찜통에 담은 콩깍지에 소금을 넉넉하게 뿌려준다. 대체 얼마만큼의 양이 넉넉한 것일까? 중간 굵기 입자의 꽃소금이 흰색으로 콩깍지의 초록색을 3분의 1쯤 덮는다는 기분으로 뿌려주면 넉넉하다.
소금을 다 뿌렸다면 물이 보글보글 끓을 정도로만 불을 줄이고 찜통을 올린다. 수증기, 즉 습열로 식재료를 익히는 찜은 완만한 조리법이므로 재료가 타거나 과조리 될 가능성도 낮다. 다만 너무 익히면 콩알 자체가 쪼그라들어 맛이 떨어지므로 깍지 표면에 물기가 송글송글 맺힐 때까지만 쪘다가 내려 그대로 식힌다.
현대 사회에서 타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인류애를 원동력으로 삼는 자발적인 친절함만큼의 온기가 남아 있을 때 깍지를 입에 넣고 이 사이에 가볍게 문 뒤 끝을 손가락으로 잡아 훑으며 빼낸다. 콩깍지의 싱그러움이 깃든 짭짤한 물이 배어 나와 완두콩의 농축된 맛에 간을 맞춰 줄 것이다. 종류에 크게 상관 없이 좋아하는 맥주를 콩깍지가 머금고 있는 온기에 반비례해 차게 두었다가 반주로 곁들이면 크게 한 것 없이 왠지 뿌듯한 술상이 어느새 벌어져 버린다.
■가공육과 잘 어울리는 완두콩
짭짤하게 찐 완두콩과 차가운 맥주. 이 둘 만으로도 짝은 충분히 맞지만 이왕이면 맥주가 씻겨 내려줄 지방을 좀 참여시키면 술상의 내실이 좀 더 깊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육류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돼지고기 가공육 종류가 완두콩과 가장 좋은 짝으로 꼽힌다.
지방과 특유의 두드러지는 짠맛으로 풍성함과 균형을 동시에 맞출 수 있으며 많은 가공육에 적용하는 훈연 혹은 훈제(전자는 연기만 쏘이고 후자는 연기와 열을 함께 쏘여 재료를 익힌다)의 향 또한 완두콩과 꽤 잘 어울린다.
그래서 이탈리아에는 ‘피셀리 알라 판체타(Piselli Alla Pancetta)’, 즉 판체타와 완두콩을 함께 볶은 요리가 ‘실버 스푼’ 같은 전통 모음집 레시피에 실린다. 한편 영국의 전통 펍(주점) 요리 가운데 하나인 ‘매시 앤 뱅어(Mash and Banger)’는 매시드 포테이토, 즉 으깬 감자와 소시지로 이루어진 요리인데, 제 3의 재료로 완두콩을 곁들인다.
무엇보다 완두콩과 돼지 가공육의 조합이 훌륭한 이유는, 품질에 아주 크게 구애 받지 않고 두루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저 완두콩과 맥주만을 먹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아무 거나 걸쳐 입고 편의점에 뛰쳐나가 눈에 띄는 소시지를 집어 오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맛을 내준다.
소시지를 끓는 물에 속까지 따뜻해지도록 삶아 완두콩을 곁들여 먹는 것도 좋지만, 둘을 함께 조리해 먹으면 손이 별로 가지 않는데도 그럴싸한 요리를 한 것 같은 효과를 내어준다. 특히 한 자루를 전부 다 찌기는 왠지 너무 대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를 밥에 두어 먹을 심산으로 까서 남겨 두었다면 절대로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적어도 같이 볶아 먹기라도 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웬만한 소시지라면 다 괜찮은데(사실은 어묵인 분홍색 제품은 빼고), 어른 손가락보다 조금 더 굵고 긴 프랑크푸르트가 완두콩과 가장 잘 어울린다. 완두콩과 크기를 최대한 맞춰줄 수 있으면서도 비엔나처럼 짧지 않으니 칼질도 쉽다. 팬에 기름을 살짝 둘러 중불에 올려 달구는 사이 소시지를 2㎝ 길이로 썬다. 기름이 반짝이면 소시지를 더해 가끔 뒤적이며 지진다는 기분으로 볶다가 기름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면 완두콩을 더한다. 역시 팬을 가끔 뒤적이며 둘을 함께 볶는데, 소시지는 익으면 부드러워지므로 질감의 대조를 준다는 차원에서 완두콩을 조금 덜 볶아도 좋다.
■수프, 봄나물로도 활용
이탈리아에 판체타와 완두콩을 함께 볶은 전통 요리가 있다고 했다. 판체타는 훈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뿐, 베이컨과 똑같이 돼지 삼겹살을 염장해서 만든다. 따라서 소시지도 판체타도 아닌 베이컨을 완두콩과 함께 볶아도 별도의 요리가 된다.
‘완두콩 베이컨 볶음’이라 이름 붙여도 무리가 없을 이 요리는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국물을 부으면 수프가 된다는 장점을 지녔다. 프라이팬 대신 냄비에 베이컨을 먼저 볶아 기름을 내고 완두콩을 더해 마저 볶는다. 그리고 닭 육수나 물을 부어 콩이 완전히 푹 익을 때까지 끓인다.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손 블렌더(도깨비 방망이)로 전체를 매끈하게 갈아주면 베이컨의 향이 바탕에 깔린, 적당히 걸쭉한 완두콩 수프가 된다. 물론 실제로 존재하는 요리이다.
정확하게 나물에 속하지는 않지만 완두콩은 어쩌면 가장 손쉬운 봄나물일 수 있다. 봄나물은 너나 할 것 없이 각자 나름의 개성대로 맛있지만 또한 예외가 없다고 할 정도로 조리는 다소 번거롭다. 뜨거운 물에 적당히 익을 정도로 데쳐 헹군 뒤 물기를 짜내고 무쳐야 한다. 한편 그 과정에서 부피도 많이 줄어들어 때로 허무할 때가 있다.
그에 비하면 완두콩은 맛과 향을 잔뜩 머금되 깍지째 먹든 콩알만 발라내 먹든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가지는 않는다. 지금껏 살펴본 맛의 여정이 방증이다. 한 자루를 사다가 쪄 먹고 소시지나 베이컨과 볶아 먹고 그 볶은 것에 육수를 부어 수프를 끓여 먹을 수 있다. 술안주부터 반찬, 간단한 아침 식사 거리까지 서너 가지 요리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 보았는데 그 어떤 것도 10분이상 걸리지 않는다.
■해동이 필요 없는 냉동 완두콩
완두콩이 마냥 신기했던 볶음밥을 처음 먹은 지도 삼십 년 이상이 흘렀지만 여전히 중국집에서는 비슷한 통조림을 쓰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문제일 이유는 전혀 없다. 지금 이렇게 입에 침이 가득 고여가며 제철 완두콩의 미덕을 잔뜩 늘어 놓았지만 이제 좀 음미한다 싶을 때 시기는 지나버릴 것이다. 따라서 제철에 수확해 아닌 철에 먹을 수 있는 가공 완두콩은 소중하다.
다만 가정에서는 통조림보다는 좀 더 싱싱한 냉동 제품을 권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잔뜩 만큼 흔한데다가 워낙 알갱이가 작으니 별도의 해동 과정을 거치지 않고 조리 과정에 맞춰 냉동실에서 그대로 음식에 더하면 된다. 특히 ‘다른 콩은 싫어하지만 완두콩만은 먹는다’라는 신념을 품고 사는 이들에게 냉동 제품은 아주 요긴하게 부엌의 붙박이로 자리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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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