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카밀레

2020-05-20 (수) 박사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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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학을 넘어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의 시간
운기가 없는 공방(空房)에 갇힌 나날들
이 계절은 화음으로 다가서 오건만
너 죽고 나 좀 살자는 불의의 역습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생존투쟁이 두렵다
영육이 쉴 노닐 곳이 없구나
만신전 영매를 찾아가랴
처용가를 읊어 만파식 피리를 불어라
역병의 공포 속에 변괴가 무섭구나
그리움 뿌리 심어진 울어메 정 그리워
텅 빈 가슴 안에 꿈틀거리는 날
귀부인 삼작노리개 달아 곱게 단장을 끝내고
미수노구를 하늘하늘 가볍게 이끌고
향포강변 나들목 건너 들녘을 지나
강어귀 모래언덕에 핀 아재비 납가새꽃
삿갓사초 카밀레꽃 옆에 앉아
바닷가 모래톱 위로 날아오는 수천 마리 떼
흰물떼새 망연히 바라보네
젖도 물리지 못한 체 이승을 떠난 울어메
어메 생각 카밀레 꽃 속을 마냥 들여다보다
화인(化人)의 혼불에 넋을 빼앗기고
정신을 놓아버린 폐인 울아베
나이 갓 지학을 지나 생계를 맡아
소쩍새처럼 살아온 음녀의 고도(孤島)
뻐국새 우는 날 흰구름 떠가는 하늘가
무한히 날고 싶은 꿈 날개를 접고
화인(火印)으로 새겨진 판화의 기억들
해풍에 실어보내는 마음 괴롭기 그지없구나
언제 또 찾아올 수 있으랴
이수(離愁)의 작별이려니
뿌리는 눈물이 업장이련가
아, 천라지망에 갇힌 덧없는 인생이였어
카밀레여 울어메 카밀레꽃이여

<박사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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