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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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식물에 얹혀 사는 ‘기생식물’ 알고 보면 귀하신 몸

2020-03-11 (수) 박정미 국립생물자원관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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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상 기생식물 전체의 1~2%, 한국에 개종용 등 10여종 서식
백양더부살이 멸종위기 보호·관리, 오리나무더부살이 뇌혈관 약재로

▶ 가지더부살이 관상용 큰 인기, 장신구·도구 등 디자인에 응용도
유전자로 환경적응 노하우 전달, 생물 다양성 보전·확산에도 기여

다른 식물에 얹혀 사는 ‘기생식물’ 알고 보면 귀하신 몸

초종용. 주로 사철쑥의 뿌리에 기생하는 열당과 식물로 바닷가의 햇볕이 잘 들고 건조한 모래땅에서 자란다. 제주도를 비롯해 울릉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다른 식물에 얹혀 사는 ‘기생식물’ 알고 보면 귀하신 몸

오리나무더부살이. 백두산에 자라는 한해살이풀로 한반도 남쪽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두메오리나무의 뿌리에 기생한다. 뇌혈관 질환에 효과가 좋은 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찾아 헤맸던 불로초로 유명하다.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다른 식물에 얹혀 사는 ‘기생식물’ 알고 보면 귀하신 몸

구상난풀. 한라산 구상나무 군락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해 붙은 이름이지만 구상나무가 없더라도 침엽수림이 우거지고 부식토가 있는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을 하지 못해 죽은 동식물의 고사체, 배설물 등을 영양분으로 먹고 사는 부생식물이다.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지구상에서 제일 큰 꽃은 무엇일까요? 힌트를 드리면, 이 꽃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등 동남아시아 열대우림에서 자라며 파리 등 수분매개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고약한 냄새를 뿜어낸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분도 많으시겠지만, 이 꽃은 바로 라플레시아 종류입니다. 라플레시아는 얼룩덜룩한 무늬의 두꺼운 꽃잎에 꽃잎의 직경이 90㎝, 무게는 7㎏에 달하며 한복판에 있는 꽃술은 60리터(ℓ)의 물이 담길 만큼 큰 꽃입니다. 라플레시아는 육상 식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녹색의 잎과 줄기는 없는 반면 특이한 모양과 냄새를 지닌 꽃과 뿌리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양분을 만들고 살아가는 육상의 그 어떤 꽃들보다 더 큰 꽃이 된다고 하니 매우 신기한 일이지요?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이 라플레시아와 같은 기생식물입니다.

종류도 특징도 다양한 기생식물의 세계


우리 사람이나 동물의 몸 내부 또는 외부에 붙어 함께 살면서 그 사람이나 동물에게 병을 일으키는 세균 또는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등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으시죠? 이렇게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의 양분을 흡수하여 살아가는 현상을 기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병을 일으키는 세균,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등 기생하는 생물을 기생자라고 하고요. 기생을 당하는 사람이나 동물은 ‘숙주’라고 합니다.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한 식물 A가, 다른 식물 B가 만든 양분을 흡수하거나 빼앗아 살아가는 것을 기생이라고 하고 식물 A를 기생식물, 식물 B를 숙주 또는 숙주식물이라고 합니다.

기생식물은 숙주식물에 의존하는 정도에 따라 크게 ‘전(全)기생식물’과 ‘반(半)기생식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광합성을 전혀 할 수 없어서 숙주식물이 만든 영양분에 완전히 의지해 그 영양분을 빼앗아 흡수하는 기생식물은 이름 그대로 전기생식물이라고 하고요. 스스로 광합성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필요 시 숙주식물의 영양분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흡수해 일부만 의존하는 기생식물은 반기생식물이라고 부릅니다.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숙주식물이 정말 꼭 필요한가에 따라 ‘절대기생식물’과 ‘임의기생식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가끔 전기생식물과 반기생식물의 중간 형태를 보이는 기생식물도 있어서, 기생식물이 숙주식물의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뿌리 기생식물’, ‘줄기 기생식물’이라고 구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생식물의 뜻을 정리하면, 기생식물은 숙주식물이 만든 영양분을 숙주식물의 살아있는 조직만을 통과해 얻어 살아가고 번식하는 식물 모두를 일컫는 말입니다.

기생식물과 모습은 비슷하나 숙주의 살아있는 조직에서 서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 ‘부생식물’도 있습니다. 말라 죽은 식물, 죽은 곤충, 이외의 동물 시체 또는 배설물인 숙주에 붙어서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식물인데요. 부생식물도 숙주에 대한 의존도에 따라 ‘전부생식물’과 ‘반부생식물’ 두가지로 구별합니다.

우리나라엔 어떤 기생식물이 서식하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기생식물은 꽃피는 전체 식물의 1~2%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패디쿨라리스 같은 종류가 자라는 북극 지역의 노르웨이 스발바드 군도에서부터 초지, 사바나, 건조한 떨기나무 지역, 라플레시아류가 자라는 열대우림 지역까지 아주 넓게 퍼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생식물 종류로는 개종용, 초종용, 백양더부살이, 오리나무더부살이, 압록더부살이, 겨우살이, 갯더부살이, 야고 등과 부생식물인 수정난풀, 구상난풀 등 10여종이 알려져 있습니다.

더부살이류와 종용류는 피어나는 꽃이 열을 지어 바닥에서 올라오며 꽃차례가 빗자루 모양 같다고 하여 열당과라고 불립니다. 그 중에서 개종용과 초종용, 백양더부살이는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보통 4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개종용은 숲 속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기생식물로 녹색소가 없어 전체가 연한 갈색 또는 분홍빛을 띤 흰색의 꽃을 피웁니다. 초종용은 중국 만주, 일본, 대만, 러시아 시베리아, 동유럽 등에서 자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바닷가 주변의 모래땅 등에 드물게 자라며 푸른색이나 보라색 계열의 꽃을 피우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초종용과 겉모양이 매우 비슷하고 꽃피는 시기까지 거의 동일한 백양더부살이는 우리나라 고유종으로 개체수가 많지 않고 자라는 곳이 사람들에 의해 훼손될 위협이 있어 현재 환경부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으로 정해 보호ㆍ관리하고 있습니다. 6월부터 8월 사이 꽃을 피우는 오리나무더부살이는 러시아, 인도, 일본, 중국, 북미 알래스카와 우리나라 백두산 일대에 스스로 자라는 기생식물로 한반도 남쪽에서 보기 어려운 한해살이풀입니다. 오래 전부터 한방에서는 오리나무더부살이를 말려서 사람의 혈관을 맑게 하거나, 뇌졸중 치료 등의 약재로 사용했다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도 오리나무더부살이 추출물에는 뇌혈관 질환에 효과가 좋은 물질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여름에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꽃을 피우는 가지더부살이는 러시아, 일본, 중국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우리나라 일부 지역에서 자라는 한해살이풀 야고 역시 중국, 미얀마, 인도, 일본 등지에서 자랍니다. 야고는 더부살이나 종용류와 같이 열당과 식물이지만 열당과 식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촘촘한 빗자루 모양의 꽃차례(꽃이 줄기나 가지에 붙어 있는 상태)와는 사뭇 다릅니다. 야고의 연분홍빛이 도는 보라색 꽃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기생식물들이 녹색 잎이나 줄기가 없으며 숙주의 뿌리에 완전 기생한다면, 겨우살이와 새삼은 황록색 줄기 또는 녹색 잎 등을 지니면서 숙주식물의 줄기에 반만 의지하는 기생식물입니다. 겨우살이는 주로 키가 큰 나무의 위쪽에 기생하며, 새삼은 숙주식물들을 휘감는 덩굴성 식물입니다. 한편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북미, 인도 유럽 등 많은 지역에서 자라나는 수정난풀과 구상난풀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부생식물로 깊은 숲 속 그늘지고 축축한 곳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기생식물과 육상식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식물은 ‘색소체’라는 작은 기관을 세포마다 가지고 있습니다. 색소체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색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 색소의 종류가 식물 세포의 색을 결정합니다. 색소체에는 엽록체, 유색체, 백색체 등이 있습니다. 녹색의 엽록소를 가진 색소체를 엽록체, 녹색이 아닌 다른 색소를 가지고 있는 색소체를 유색체라고 부르며 백색체에는 색소가 없습니다.

육상의 녹색식물들은 엽록체를 가지고 있어 광합성을 하며 스스로 살아가고 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녹색소가 없거나 부족한 기생식물이나 부생식물은 엽록체가 아닌 유색체나 백색체의 색소체를 가집니다. 스스로 완전하게 영양분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숙주식물로 흡수한 영양분을 저장하죠. 기생식물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뿌리에 있는데 그것은 ‘흡기’라는 것입니다. 흡기는 기생식물이 살아있는 숙주식물의 조직을 통과해 숙주의 영양분을 잘 흡수할 수 있도록 하는 전문화된 특수 구조입니다.

흡기를 이용하는 기생식물은 어떤 숙주식물을 좋아할까요? 기생식물도 우리 사람처럼 자신들이 살기 좋은 조건을 제공하는 숙주식물들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햇빛이 풍부한 지역을 좋아하는 줄기 기생식물들은 열대초원과 같은 사바나 지역 등에 흔히 사는 숙주식물을 좋아하는 것이죠. 어떤 기생식물 종류는 오직 특별한 숙주식물에서만 자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생식물 대부분은 국화과, 콩과, 벼과, 사초과, 덩굴식물류, 키가 크고 줄기가 굵은 나무류 등 특정한 식물을 가리지 않고 아주 폭넓게 숙주를 선택합니다.

흥미로운 건 남아프리카지역의 겨우살이 종류처럼 자연에서는 오직 어느 특별한 숙주식물만을 좋아해 선택하고 기생했다고 할지라도, 기생식물 배양실험에서는 특별한 숙주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만 맞으면 다른 여러 가지의 숙주식물에서도 잘 자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듯 기생식물과 숙주식물의 관계는 서로 둘만 좋아한다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라는 토양, 수분, 영양분, 이동할 때의 주변 환경, 토양에 사는 미생물, 기후 등 여러 생태학적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해 나타납니다. 때문에 쉽게 어떤 기생식물이 특정한 숙주식물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숙주식물에 완전 의존하는 전기생식물이 반기생식물보다는 특별한 숙주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지킬과 하이드’ 두 얼굴의 기생식물

오래 전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오리나무더부살이, 겨우살이, 종용류 등 많은 기생식물과 부생식물이 사람의 질병 치료 약재 또는 관상용으로 직접 이용되거나, 간접적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장신구와 도구 등의 디자인에 응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유럽 및 미국 등지에서 자라는 기생식물은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때로 올리브나무, 토마토, 해바라기, 당근, 콩 등의 농장이나 밭, 그리고 상업 지역의 숲에 넓게 퍼져 농작물과 나무들을 숙주식물로 삼아 식품의 수확량이나 생활용품 생산량을 감소시켜 심각한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숙주식물과 다른 생태적 환경이 어떠하냐에 따라 같은 기생식물이라도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얼굴로 보이는 셈입니다.

기생식물도 지구상의 다른 생물처럼 자신들이 지닌 모습을 유전자를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합니다. 자연에서 살아가기 유리한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때 기생식물은 자신의 유전자와 숙주의 유전자를 함께 자신의 다음세대로 전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기생식물은 숙주도 자신과 같이 단순히 살아남는 것뿐만 아니라 번식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도울 것이고, 만일 기생식물의 유전자가 숙주의 유전자와 같이 다음 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든 숙주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긴 진화의 시간을 거치면서 살아가고 번식하는 것이 유리해지면 더 이상 기생식물이 아니라 숙주의 조직에 합체돼 기생식물로서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생식물의 적응과 진화 과정에 보이는 모습들은 생물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입니다.

점점 기계 문명화돼 가는 이 시점에도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은 지구상에는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물들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물이 각각 자신에게 유리한 유전자와 환경을 선택하고 적응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생물만이 오래 살아남고 번식할 수는 없습니다. 기생식물과 숙주처럼 때론 완전히 또는 반만 의존하는 관계라고 할지라도 어느 한쪽만 유리한 경우는 없습니다. 모두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즉, 생물다양성 보전에 대한 노력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이 함께 오래 사는 방법인 것입니다.

<박정미 국립생물자원관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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