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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여래사 창건주 설조 큰스님(사진)이 다시 왔다. 지난해 10월 말 개원 38주년을 전후해 한 달쯤 머물다 간 이래 근 1년만의 여래사 귀환이다. 약 3주 예정으로 9월 30일 홀로 온 스님은 4일 낮(통화)과 밤(대담)에 도합 5시간 가까이 종단개혁 투쟁비화 등 여러 주제에 대한 소회를 털어놨다. 여래사에서의 대담 자리에는 진월 스님이 함께했다. 그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중심으로 정리한다.
설조 큰스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여름과 올해 봄 6개월 간격으로 수십여일 단식정진을 두 차례 했다. 구호는 늘 같았다. 반향은 영 달랐다. 낮이면 섭씨 40도에 육박하고 밤에도 섭씨 25도를 넘는 열대야가 지속된 지난해 여름, 서울 조계사옆 우정공원 천막에서 41일간 행한 단식정진은 연일 도하 신문방송에 중계되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조계사 인근 거리를 가득 메운 개혁물결에 휩쓸려 설정 총무원장은 임기 4년 중 1년도 채우지 못했다. 올해 2월 중순부터 70여일간 최소한의 영양공급만 받아가며 조계사옆 정정법당에서 행한 단식정진은 불교전문 매체에도 잘 보도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 업이 그러니” 하며 내놓은 스님의 답은 뜻밖이었다. “도적놈들은 생존력이 좋아요, 생존력이.”
종단적폐의 중심이라 비판해온 00 스님 세력이 “전 정권 전전 정권 때는 거기에 붙더니 현 정권에도” 줄을 댔다는 풀이였다. 적폐청산을 내건 정권이 설마 그럴 리가?! 스님은 단호했다.
“(지난해 여름 단식 뒤) 병원에 있을 때 여러 군데서 말이 들려요, 청와대 000 수석이 ‘설정 총무원장 퇴진은 가능하나 그 이상은 불가하다’ 했다고. 그 수석의 뜻인가 그 윗선의 뜻인가 알아보니...”
스님과 함께했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섰다, 태도를 바꾸거나 발길을 줄이거나 아예 연락을 끊거나. 000 신부는 격려방문을 하기로 했다가 돌연 취소했고, 지방에서 상경해 지지를 표했던 000 법사는 xx당 xx위원장이 된 뒤 공인이란 이유로 연락을 말아달라 했다고 스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종단 기득권층(스님 입장에선 적폐세력)의 압박은 전방위적이었다, 비난 성명서, 음해성 폭로회견, 회유와 협박 등. 최근에는 해종특위가 스님을 포함해 54명을 해종행위자로 발표했다. 형식은 징계 요구요, 내용은 징계 예고다. 스님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이들이 뭔 짓을 못하겠어요? 상관없어요, 나는.”
스님을 아프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올해 단식) 52일째 되는 날 몇이 왔는데 어떤 이가 ‘일제 때 독립꾼들이 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처럼 총질 하고 폭탄 던지듯이 스님이 지금...’ 이러는 거요. 날 뭐라는 건 몰라도 독립운동가들을 그렇게 매도하다니...”
스님이 그래봤자 뭐가 달라지냐는 이들에겐 이렇게 답했다 한다. “만해 스님 같은 분들이 금방 독립될 줄 알고 독립선언을 했겠는가... 불이 났는데 힘이 없어 불을 끄지는 못해도 ‘불이야’ 소리도 못치는가...”
안창호 류영모 김흥호 함석헌 선생 등 기독교계 선구자들과 그들로부터 배울 점, 종교화합과 남북통일, 1970년대 유신체제를 비판했던 서옹 종정과 유신체제를 옹호했던 경산 총무원장의 엇갈린 운명, 작금의 ‘조국 사태’와 좌우분열까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경험과 생각’을 들려주던 스님은 문득 곁들였다.
“나한테는 (1980년 10월) 법난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온 원죄가 있으니까...“ 종단개혁 투쟁을 멈출 수 없는 이유 겸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들렸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저번에 비온 뒤에 보니까 법주사 마당에 버섯이 자라요. 마사토(잔모래)로 덮힌 곳인데 파보니까 낙엽부토(낙엽이 썩은 땅)라. 뭐든지 다 그렇게 인연이 있는 겁니다.” 투쟁을 멈추지는 않되 서둘지도 않으면서 시절인연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일까, 그렇게 하면 끝내는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리라 믿는다는 뜻일까.
한편 스님은 한국을 방문중인 주지 광전 스님이 이달 하순 돌아오면 속리산 법주사로 되돌아갈 예정이다. 나주 운흥사에 머물면서 한달에 한두번 서울을 오가며 정정법회를 이끌어온 스님은 지난 8월 법주사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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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