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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듯했다. 처음 ‘그 얘기’가 나온 건 조지아 거주 한혜경 보살이 북가주에 다녀간 초여름이었다. 할일은 많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죄다 텅 빈 상태였다. 밑천도 없었다. 수선회에 보관중인 2010 불자연합 송년잔치 잔금 얘기가 잠깐 나왔지만 “보다 뜻깊은 일을 위하여” 이내 단념했다. 준비위원회니 홍보팀이니 하는 조직도 없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오륙십대 이상이라면 어렴풋한 추억 속에 남아있을, 숨바꼭질 할 사람 여기 잡아라 하는 식으로 ‘2019 북가주 불자 야유회’ 준비는 시작됐다.
결과는? 벌써부터 다음 야유회가 기다려진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내친김에 불자연합 송년잔치를 부활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성공의 아버지는 수십명이라는데, 뭔가 잘되면 내 공이라 뽐내는 이들이 많다 해서 그런 말이 있다는데, 9월21일 산타클라라 센트럭팍에서의 ‘가을의 공원 불자 야유회’ 성공을 두고는 스스로 공치사를 하는 이가 전혀 없다.
그래도, 이구동성 칭찬하는 법우가 있다. 광명화 김준자 보살(사진)이다. 행사 당일에도 그는 곳곳을 누비며 진행을 돕는 한편으로 소중한 장면들을 손수 카메라에 담느라 바빴다. 행사 뒤에는 준비와 진행에 함께했던 이들과 만나 결산보고 겸 평가회를 갖고 그 결과를 카톡방에 올렸다. 야유회 이튿날 기자는 광명화 보살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후속기사를 위해서였다. “저는 그냥 북가주 불자들과 사찰 스님들 모두 함께 한자리에 모였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한혜경 보살님의 염원으로 맡아 했을 뿐입니다.”
기자는 다시 보챘다. 보살은 거듭 사양했다. 서너 번 핑퐁 끝에 9월 27일과 28일 통화가 이뤄졌다. 한혜경 보살부터 시작해, 어디서 하나 막막할 때 참 좋은 그 곳을 추천해준 묵소 보살, 포스터를 만들고 음향을 담당하고 진행보조까지 맡은 이상운 거사, 준비와 진행은 물론 찬불합창에 앞장선 자비행 보살, 먼 곳 가까운 곳 가리지 않고 자신과 동행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은 청정해 보살 등을 거명하며 광명화 보살은 자신에게 공이 쏠리는 것을 경계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스님들, 사정상 나오시지 못했지만 호의적으로 대해주신 스님들께도...샌프란시스코원불교당 교무님도 원불교 행사 때문에 못오셨지만 좋은 말씀을 많이 주셨다”고 감사를 표했다.
비용문제도 일손문제도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살님들 거사님들 수십명이 나눠서 밥 해오시고 반찬 가져오시고 하셨으니, 또 모든 프로그램이 재능보시로 진행됐으니...” 장소 사용비와 일부 선물비 등 최소한의 비용은 십시일반 보시로 해결됐다. 그러고도 남은 600여달러는 무거운 물품을 싣고 행사장에 바싹 댔다 주정차 위반 딱지를 받은 차량 3대의 과태료 납부에 나눠쓸 요량이다.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고, 고교 대학 시절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마취과의사로 일하던 2002년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의 순회강연을 듣고서 불교에 눈뜨게 됐다는 광명화 보살은 언론을 통해 본 북가주 한인불교계의 활기가 부러웠다고 한다. 그랬기에 2013년 딸과 사위와 손녀가 사는 북가주로 이사오면서 기대가 컸다고 한다. 그러나 그 즈음 북가주 불교계는 침체기. 최근까지 그랬던 불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 그는 얼마 전 불자카톡방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번 행사를 위해 애써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와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큰 행사를 멋지게 치러내신 여러 불자님들의 열정과 능력 그리고 화합하시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다만 다음 기회에 또 행사가 마련된다면, 불교의 먼 미래를 위해 좀 더 다양한 연령층의 참가를 이끌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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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