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한국일보 ‘여성의 창’에서 ‘공감 백’ 글 한 편을 만났다. “나는 오늘 X을 쌌다.” 발칙하게 들리지만 진실성이 담긴 글이었다. 공감이 갔던 건 나도 비슷한 경험을 몇 차례 해봤기 때문이다.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로는 이루 표현이 힘들다. 디그니티(품위) 완전상실! 가까운 화장실이 내 구세주일 뿐! 그나마 다행히 일은 안 벌렸으나 그 후유증으로 며칠간 영육 간으로 심히 고생했다.
오늘 쓰려는 글의 논지도 그 글의 결론과 비슷하다. 인간은 별거 아니라는 사실. 대단한 품격의 언행을 하고 그 유지를 위해 모든 환경들을 동원시키는 능력을 소지한다 한들, 내 괄약근 하나도 내 맘대로 조절 못하는 존재가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감사하게, 그 근육이 쉽게 조절될 때 찾아오는 그 만족감이란 실로 대단하다. 역시 인간은 별거 아니다.
언제부턴가 아내와 나누는 아침인사말이 이렇게 바뀌었다. “지난밤 잠 잘 잤소?” 잠이 하루출발의 주제가 된 것이다. 지난밤 잠 잘 자면 오늘 하루가 만족이다. 잘 못 자면 하루가 힘들어진다.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매일 잠 조절의 실패를 경험하는 이라면 이 인사말의 무게를 실감할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잠 하나에 삶의 희비가 엇갈리는 존재에 불과하다.
아내나 나나 젊었을 땐 잠에 있어서만큼은 거의 문제가 없었다. 난 잠돌이, 아내는 잠순이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 누가 뭐랄까 딸과 아들도 그렇다. 그들은 우리의 그 유전자를 타고난 것 같다. 얼마나 잠을 잘 자는지. 가만 놔두면 하루 24시간 끄떡없이 잔다. 분명코 우리부부도 과거엔 그랬다. 그래서 젊은 시절 목회할 때 새벽기도 하는 게 힘들었다. 누가 새벽기도를 만들었나, 라고 원망(?)하며 그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많이, 깊이 잘 못 자고 있다. 특히 아내는 갱년기를 통과하면서 이게 매우 심해졌다. 우리부부는 지금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상황에 와있다.
먹는 게 낙이던 시절, 하고 싶은 운동 맘대로 하던 시절, 몸 삐끗한 것 정도는 탈탈 털고 금방 일어나던 시절, 그땐 유명인사의 요절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워커홀릭 대기업 회장님, 살 빼겠다고 나선 유명연예인, 올림픽 메달리스트 운동선수, 정말 영원히 살 것 같아 보이는 그들이 어느 날 급작스런 건강이상증세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보도를 접할 때면, 지금은 이 질문이 내게 더 자연스럽다. “그들은 잠은 잘 잤을까?” 잘 먹고, 골라 먹고, 최고의 트레이너를 동반한 규칙적인 운동을 잘했다 해도, 그들은 정말 잠은 잘 잤을까? 이게 궁금한 것이다. 아마 지속적인 불면증이 그들의 요절에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편 127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목사이면서도 전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잘 몰랐다. 그땐 잠을 잘 잤고, 그래서 “그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제일 사랑 받는 자인가?”라고 자연스럽게 여기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의심할 정도로 잠이 잘 컨트롤되지 않는다.
그래서 잠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우리네 인생이 한심하다고? 그건 또 아니다. 말하고 싶은 건 역으로 그 반대다. 한심한 게 아니라, 잠 때문에 오히려 인생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게 더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경험할 때 더 성숙해진다. 한계 경험이라는 게 그럼 내 맘대로 해보겠다고 해서 찾아오는 그런 것이던가? 그렇지 않다. 한계는 내 인생에 대개 느닷없이 쳐들어온다. 그때 그걸 잘 받아들이며 나의 연약함을 응시할 줄 안다면, 그 순간 난 자동적으로 지혜롭고 성숙해진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의미를 깨닫게 된 이 시점에 난 이미 많이 겸손해졌다. 잠 하나도 조절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해진 날 여전히 여러 모양으로 기억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에 그래서 더 동의한다. 연약할 때 오히려 더 강해진다는 그의 ‘역설적 인생법칙’말이다. 아, 감사하다! 잠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오늘 내게 찾아온 ‘잠의 신학(sleep theology)’이다.
<
김 숭 목사 /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