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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칼럼] 반해(年)를 넘는 길 위에서

2019-07-18 (목) 우남수 목사 / 행복연구원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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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의 반을 훌쩍 넘겼다. 6월 30일 마지막 주일을 지나 7월에 들어섰다.

지난 6개월을 돌이켜보니 동남아 선교여행을 다녀온 것 외로 이렇다하게 뚜렷이 하나님을위한 일을 한 것이 별로 없다.일년의 전반 6개월을 너무 안일하게 허송세월로 보냈구나하는 자책감이 든다.이해인 수녀의 회개의 시구를 읊조려 본다.

“우리 모습이 당신의 뜻과 같지 않음을/시시로 한탄하며 이렇게 왔습니다./ 보잘것 없는 믿음으로 이렇게 왔습니다./기쁠때엔 감사하지 않고 / 편리한 ‘운명’과 악수하며 / 적당히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전(前)과 짝이 되는 후(後)반 6개월이 있기에,마지막 잎새한장12월 달력을 바라보는 년말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은 없다.운동경기에서 전반전을 끝내고 휴식시간을 갖고 후반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숨을 고르며,전반전의 우(愚)를 반복하지 않도록 작전계획을 짜야 되겠다.

우리는 보통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며,어떤 길을 걸으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등등을 언급하며 걸어온 인생길을 얘기한다.기독교인으로서 걸어온 인생길에 대해 생각할 때,두가지 인상깊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하나는 성경다음으로 세계적으로 많이 읽혀졌다는 존 번연의‘천로역정’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본문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7절 말씀이다.전자는 청교도였던 존 번연이 신앙적인 문제로 12년간 투옥생활을 할 때 쓴 고전 명작중 하나로, ‘순례자’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장차 망할성’인 ‘장망성’을 떠나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성경적 소설이다.

후자는 유명한 예수님의 고별설교 가운데 그의 아이덴티티를 세가지(길,진리,생명)로 설명한 유명한 본문이다.

존 번연은 예수님이 예비하시는 처소를 우리가 거할 하늘나라 신의 도성으로 보고,모든 순례자들은 그곳을 향해 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길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셨다.구체적으로 확인하기를 좋아했던 이성적인 도마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가는 길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고 싶었다.그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보통생각하는 길(way) - 두 지점(시발점과 종착점)을 연결하는 길을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나 예수님의 답은 핀트가 맞지 않는 엉뚱한 답이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이 흔히 쓰셨던 비유와 한단어의 이중용도를 여기서 쓰고 있다.특히 동양식 사고에서도 같은 ‘길’이란 표현이 한문 도(道)로 표현될 때 어떤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나 인류의 어떤규범이나 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 한 분에 대한 삼중표현은 삼위일체같이 그의 사역의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절묘한 표현이다.어느 주석가는“예수그리스도는 하늘나라 가는 길 자체 임으로,올라타야 합니다.그것은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과감히 올라타면 자연히 위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하늘나라 가는 길은 네비게이터가 필요 없다.주님 말씀하신대로 무조건 말씀을 순종해서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일해 가면서 주님과 함께 할 때 어느 틈엔가 하늘나라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7월을 맞아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지난 6개월을 돌이켜 보며,비록 육신적 몸은 더 허약해 지고,먹는 약은 두가지가 늘었지만,내 영혼은 매일 아침 새롭게 변화되어 주님과 더 가까이 하나 된 것에 감사드렸다.죄인인 나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결해주신 ‘길’되신 주님,그의 행하신 모든 일과 그 자신은 완전히 불변하시는 참된 주님,육신적인 생명은 언젠가 다하지만,영원한 영혼의 생명 되시는 주님이 계심에,그와 함께 함에 감사드렸다.

예레미야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아침마다 새로운 인자와 긍휼을 맛보며 감사했던 것이 다시 마음속을 울렸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애가3:22-23)

<우남수 목사 / 행복연구원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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