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다보니, 나무라고 제 성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까탈스런 놈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똑 같이 돌봐도, 죽는 나무가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일체 만물이 제각각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왜 같은 조건에서도 일찍 죽는 나무로 왔는가?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의문을 누구나 한번쯤 갖는 거 같다. 그래서 와서 묻는다. 왜 나만, 남들은 다 잘만 사는데, 왜 나만 살기 힘든가? 라고.
그 이유에는 가늠하기 힘든, 생명 운행의 배열과 조합이 숨어 있다. 생의 씨줄 날줄, 즉, 인연법이다. 당신이 그 자리에 하필이면 그 모습으로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남들은 다 가졌는데 나는 왜? 불평하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만든 세상임을. 그래서 7억의 사람이 다 다른, 각자의 세상에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세상 만물은 다 달라야 한다. 노소도 있어야 하고 흑백도 있어야 한다. 다르게 살면 아무 문제없다.
그런데 세상이 자꾸 같아지라,고 한다. 스마트폰이 옳고, 요런 쪽으로 이쁜 게 옳고, 비싼 게 옳고, 젊은 게 옳고... 식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그 같,아,지,려,는 욕망 때문에, 무난히 행복해야 할 삶이 열등해지고 가난해지고 이쁘지 않아져 버린다. 아주 한정적이고 색안경 같은 세계화이다.
당장 저 아프리카나 시베리아에까지 안 간다 해도, 이 미국에서만도 달라스와 뉴욕은 정말 다르다. 세상엔 전혀 다른 사고와 형태로 살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인연의 조직체에서는 모두가 같으면 안된다. 같을 수도 없다. 미생물부터 고등생명체까지 다 같이 필요해서 거기 있는 것이다. 고등이라고 더 중요하고 미생물이라고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 나름대로 서로에게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그래서 너도 나도 중요하다. 생긴 형태가 무엇이든, 그 자체가 잘못이 아닌데, 그 자체의 중요성을 일반화에다 끼워 맞추고, 남들,의 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잘,못,인 거처럼 보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남의 잣대에 맞추며 살아야 한다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정보라는 이름으로 세뇌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들처럼, 남들 보다, 남부럽잖게...그런데 당신이 맞추려는 그 ‘남의 세상’은 세상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나라를 모르고, 모든 세상의 삶을 모르는데, 굳이, 코 앞의 작은 세상의 평가에 나를 갖다 대고 괴로울 필요가 있는가. 남들처럼 안 살면 어쩐지 뭔가 잃을 것 같은가?
그것이 바로 당신의 욕심이다. 그 욕심이 당신의 세상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욕심을 뻗치고 살든지 버리고 살든지, 그것도 당신만의 세상이다.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다. 그걸 결정하는 그 마음 하나, 그 본질은 세상 사람 모두가 같다. 그 하나가 오늘 하루를 당장 자유롭게 운행할 수도 있고, 타인의 세상에서 버걱거리게 만들 수도 있다. 그 하나가 내 세상을 만드는 것이지, 바깥 세상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하나,를 깨달아 알면, 삶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걸 아는 순간, 삶은 고통에서 아름답게 진화한다. 그것을 찾아 누려보라,는 것이, 그것이 수행으로 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당연히 쉽게, 그냥은 안된다. 치열하게 알아내야 한다. 그럴 가치가 있음을 이 중은 안다. 당신도 알길, 진심으로 간절히 기원한다. ‘구름은 저 자유로운 창공에 있고, 병 속의 물은 병 속에 갇혀 있다.’ 둘은 다르게 보이시겠만, 똑같은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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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스님 / 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