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차를 타고 가면서. 이 길은 내가 잘 아는 길이니 이리로 가자, 했더니 네비가 저리로 가라 하니 저리로 가겠다, 고 한다. 기계를 더 믿는 사람 옆에서 중은 입을 다문다.
언제부터 사람의 경험치보다 기계가 우위가 되었을까. 물론 요즘은 인공지능이다 머다 해서, 네비가 상황상황 교통흐름을 보여주고, 바로 전 사고 소식도 알려주는 등, 상당히 스마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의 오랜 경험치까지 다 알고 있진 않다. 쇼트커트를 가르쳐 주지만, 말 그대로 직선거리가 짧은 것을 알려줄 뿐, 그 길이 험난한 지형이고 거친 길이라, 돌아가는 편이 좋다는 걸 모르기도 한다. 어느 길은 신호가 많고, 장애물이 많은 길이고, 그래서 운전이 더 피곤하다는 것 또한 가르쳐주지 못한다.
경험치,라는 것은 길 위의 풀 하나 까지 아는 것이다. 어느 즈음에서 급커브가 있고, 어느 지점에서 사슴이 자주 튀어나오며, 어느 시간대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지, 봄에는 한가하고, 겨울엔 어느 지점이 얼어있는지, 세세히 아는 것이다. 네비는 그걸 모른다. 네비가 나쁘다, 가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지혜는 세상의 그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사람이든 기계든, 뛰어넘을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운전을 오래 한 이와 초보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나 경험치를 초보에게 들려줘도, 초보는 잘 듣지 않는다. 겪어보고, 크고 작은 사고도 내고, 빗길에 미끄러져 봐야, 경험자가 말하는 그 말의 뜻을, 비로소 알고 후회한다.
60이 아무리 40에게 지금 간수하지 않으면 이 나이에 고생한다 해도, 40은 60의 뜻을 모른다.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치다. 바른 길 알려줄 수 있는 것도 경험치다. 그러나 그 경험치가 절대적으로 아름답다 해도, 상대에게 아름다이 받아들여지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얘기다. 길이 험난해도, 길이 맘에 안들어도, 네비가 가르쳐준 길을 더 옳다고 믿는다면, 거기서 경험 운운은 그저 먼지같은 것일 뿐이다. 요즘은 모두가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그리고 몰라도 바로 알려주는 스마트폰이 있어서,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혜가 무가치한 세상이 되었다. 경험 많은 어른이 그래서 존중받지 못한다. 불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너무 자기식대로 많이 알고들 있어서, 스님들 고유의 경험치가 들리지 않는다. 예전엔 부처님 한 말씀 들으려 허위허위 산으로 갔다. 힘들게 가서 노스님 촌철살인 한마디에 가슴이 시원해져서 돌아왔다. 요즘엔 그 부처님 말씀이 인터넷에 막 돌아다닌다. 그 듣고자하는 강력한 간절함이 없이, 너무도 쉽게 들려지기에, 촌철살인의 한마디도 그저 낯익은, 내가 아는 것 같은 말일 뿐이다. 스님 법문 뿐 아니라 부처님 법도, 그닥 본인이 아는 것 보다 대단한 것 같지도 않다. 굳이 찾아가 듣고 싶지도 않다. 설령 들려줘도 못 듣는다. ‘들으려는 귀’가 없기 때문이다. 절에 와서도 법문 듣기보다, 자기식 불교 내놓기 바쁘다.
그런데... 그리 세상 다 알고, 마음 편해지는 법도 다 알고, 치유법도 다 아는데, 그들의 마음은 왜 여전히 편치 않고 공허하고 더 들끓는 걸까. 왜 그럴까. ‘알고만’ 있기 때문이다. 식, 만 있지 행,이 없기 때문이다. 안다고 해서 바로 행이 이어지진 않는다.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그 수행의 여부가 경험치이다. 오늘도 스마트한 세상사람들은 거대한 정보 산들이 되어, 한발 움직일 때마다 걸리는 것도 많고, 부딪치는 것도 많고, 세상 살기 힘들다. 어찌하면 될까? 컴퓨터에 물어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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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스님/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