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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칼럼] 추억의 소환장을 발부하라

2019-05-02 (목)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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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목사다 보니 매일 대하는 성경이 지적 분석의 대상이 될 때가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런다. 이러한 무의식적 오류의 습관을 일거에 깨우쳐주는 책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의 시편이다. 왜냐하면, 시편은 논리적 깨달음을 요하는 법조문이나(모세오경), 마음의 통증을 감안하고 들어야 하는 설교집이나(예언서), 또는 교회 질서 구축을 위한 강령(사도의 편지) 같은 장르가 아닌, 우리 내면의 원초적 감성을 건드리는 하나의 노래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시편을 읽을 때마다 시인의 심정으로 울고 웃기도 하며, 어쩔 땐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영혼의 일시적 혼절을 경험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시들이 몇 있다. 하나님 창조의 탁월함을 아름다운 필치로 노래한 19편과 104편, 자신의 죄과를 뉘우치며 애끓는 심정으로 노래한 다윗의 시 51편, 영혼의 깊은 어둠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실존을 노래한 139편, 그리고 부르고픈 노래가 실종되어버린 비참한 처지를 한탄하며 지은 137편이 그것이다.

오늘 칼럼의 주제가 이 중 마지막 것인 137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긴 했으나 성경엔 그리 밝지 못한 편이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읽기란 자기 좋아하는 몇 구절에만 의존하는 방식이다 보니 이런 게 성경에 있는 줄 모르는 게 더 당연했을 것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그런데 그랬던 내게 이 시는 다소 엉뚱한 상황에서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다. 그때 ‘보니 엠’이라는 자마이카 출신들로 구성된 혼성보컬그룹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하도 사운드가 좋아 계속 따라 부르곤 했는데, “어, 이상하다, 이거 어디서 들은 말인데!” 이렇게 된 것이다. 시편 137편이었다. 자마이카 출신 가수들이 왜 유대인들의 한을 대변하는 이 노래를 불렀을까, 아직도 궁금하긴 하지만 아무튼 난 그들의 노래를 통해 이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 지면을 통해 이 시의 주제를 신학적으로 다시 설명하고 싶진 않다. 다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 익명의 시인이 이 통한의 시를 지으며 사용했던 중요한 장치에 대해서만 언급하련다. 그것은 ‘기억’이다. 아주 생생한 기억이다. 지금의 망국의 설움이 더해지는 것은 과거에 그들 안에 현존했던 시온의 노래 때문이다. 우리는 그때 고국에서 우리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노래를 맘 놓고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정말 속이 상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의 노래들도 대부분 우리의 추억을 대변한다. 남녀 간 사랑의 기쁨, 이별의 아픔, 나이 들어감의 상처, 실향의 한, 먼저 가신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 심지어 무기력 증에 대한 호소까지, 가만 보면 그게 좋은 거든 싫은 거든 과거의 추억과 관련되지 않은 게 없다.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우리의 노래들은 대부분 그리움 안에 있다.

요새 많이 등장하는 말이 좋은 추억 만들기, 좋은 추억 쌓기이다. 오늘 내가 뭘 하더라도 그게 나의 미래 언젠가는 추억의 필름으로 남을 게 분명하니 잘하자, 잘 살자, 이런 의미일 게다.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게, 나쁜 추억은 상처로, 좋은 추억은 그리움으로 간직하고야 만다. 난 아내가 ‘꿈돌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꿈을 잘 꾼다. 꿈들 대부분은 나의 과거와 관련된다. 난 꿈에서마저도 내 추억의 소환장을 열심히 발부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의 좋은 추억은 내 현재의 힘이다. 그렇다면 지금 만들어가는 내 삶의 모습들은 내 미래의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게 좋은 게 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잘 살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내 삶이 반드시 기억하고픈 좋은 추억거리가 되도록 하자는 얘기다. 그래서 그때 가서 ‘좋은’ 추억의 소환장을 잘 발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결론은? 지금 잘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이 결론과 함께 현재를 잘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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