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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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탑의 추억

2018-09-05 (수) 김희우/퀸즈 베이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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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탑을 세계의 중심(Mitad del Mundo)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적도를 북반구와 남반부로 가르는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0도 0분 0초 선상에서 한쪽 발은 북
반구, 한쪽 발은 남반구에 걸치고 인증 사진을 찍는다. 그 적도 탑은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해발 2880m의 고지 키토에서 1985년 1월, 우리 가족은 새 둥지를 틀었다. 키토의 10층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렌트 하였는데, 수도 사령관 소유의 집이었다. 침실에 누우면 폭넓은 창 너머 하늘이 보이고, 고지에서만 볼 수 있는 가지 각양의 구름이 변화무쌍한 모양으로 손에 잡힐 듯 낮게 떠 있다. 하루에 한번 스콜이라는 소나기가 지나가는데, 마음
까지 씻어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에콰도르에 도착한지 두 달 후, 남편과 나는 오피스 변호사 파티에 초대 받았다. 생애 처음으로 성대한 연회에 참석한다는 설렘과 함께 모국에서 준비한 파티복을 입을 기회가 생겼다. 잠자리 날개를 연상시키는 실크 드레스는 시스루(seethrough) 룩 패션으로, 얇게 비치는 검정 바탕에 금실과 연보라, 노란색, 연두 빛이 어우러져 마치 들녘의 로즈메리 꽃을 연상시키는 고운빛의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파티는변호사의 40세 가까이에 얻은 늦둥이 딸의 유아영세 식이었는데, 현직 대통령의 친구이자 유능한 변호사인 그는 큰 부호로, 그 격에 맞게 키토의 명문가들이 모인 호사스러운 파티였다.


큰 홀에서 밴드가 남미의 음악을 연주하고, 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아치형의 이층 발코니에서 변호사 부인이 축배의 잔을 들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파티가 시작되었다. 아래 메인 홀에서 신부님께서 아기에게 물로 세례를 주시고, 이마에 성호를 그으시며 축복해 주셨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도 환호하며 아기의 세례를 축하해 주었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연주되자, 변호사와 부인의 왈츠를 시작으로 모든 이들도 남미에서 즐기는 꿈비아를 흥겹게 춤추기 시작했다. 한 테이블에 긴장해서 수줍게 앉아 있는 내게 한 신사가 걸어와 춤을 청하였다.오! 나는 멋진 실크드레스를 입고앉아 있다, 갑자기 어릿광대가 되는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고개를 저으며“ No”만을 외치는 반벙어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춤출 줄 모른다는 표현을 그 신사는 거절의 의미로 해석하고 계면쩍어 홀 밖으로 나갔다. 궁여지책으로 홀 밖에서 인사들과 담소중인 안드레아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그 신사분에게 양해를 구하였다. 그 양반은 이해가 되었는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홀 밖에서 스텝을 가르쳐 주었다. 리듬 감각이 둔한 나는 주춤거리는 불편한 동작으로 춤을 추면서 잠시 아버지의 근엄한 교육을 탓했다. 아버지께서는 가무와는 거리가 먼 절제된 품위와 덕목을 지키는 엄한 교육을 하셨기 때문이다.

파티가 끝나자 긴장과 지루함 속에서 해방되는 후련함으로 마음도 가볍게 홀을 빠져 나오면서 줄 곧한 생각만 했다.“ 열심히 스페인어를 배워야지” 하고. …

<김희우/퀸즈 베이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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