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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칼럼/ 암기과목과 이해과목

2018-08-20 (월) 문주한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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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얘기다. 상업학교를 나와, 은행을 몇 년 다녔다. 사표를 내고 독서실에 앉았다. 대입 학력고사 까지는 100일. 수학은 우선 포기했다. 그리고 나머지 과목은 무조건 외웠다. 수학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들에서 거의 만점을 받아, 운 좋게 대학에 들어갔다. 포기한 수학을 상식(?)으로만 풀었는데, 달랑 4개 맞았다(전부 3번으로 찍을걸.. ㅠㅠ). 하여간, 당시에는 암기가 주효했다.

반대도 있다. 미국 운전면허 시험. 공부를 전혀 안했으니, 가령, 신호등의 순서를 묻는 질문에는 '한국과 같겠지'하는, 지극히 상식만 갖고 답을 했다. 남은 문제는 마지막 하나. 맞추면 합격이고, 틀리면 떨어진다. 2시간을 그렇게 버텼다. 결국 청소부가 왔을 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엄마 얼굴을 떠올리며 찍었다. 앞의 수학시험과 달리, 다행히 여기서는 상식이 통했다. 세무와 회계도 이렇게 암기할 것이 있고, 이해할 것이 있다. 암기가 필요 없는, 상식이 통하는 사례를 함께 보자. 흥부와 놀부가 말을 탔다. 승마비를 내년 세금신고할 때 공제받을 수 있을까? 흥부는 가능하다. 그러나 놀부는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흥부는 드라마 '주몽'에 출연하는 단역 배우다. 다음 주에는 고구려 들판에서 송일국의 뒤를 따라 말을 달리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다. 감독이 말을 탈 줄 알아야 쓴다고 해서, 부랴부랴 승마 연습을 한 것. 그러니 이 승마비는 흥부의 직업에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necessary) 지출이다. 따라서 흥부는 비용공제가 된다. 그러나 그냥 취미로 말을 탄 놀부는 공제가 안 된다. 그런데 만약 흥부가 아주 비싼 정유라 말로 연습했다면? 그러면 공제가 안 된다. 아무리 필요했더라도, 사회 통념상(ordinary) 너무 지나치면 공제받을 수 없다. 비용 공제를 잘 모르겠으면, 일단 그것이 흥부의 승마비인지, 놀부의 승마비인지. 그리고 같은 흥부라도 그것이 그냥 조랑말인지 정유라 말인지를 떠올려보자. 어느 정도는 답이 나온다.


두 번째로 상식만 갖고는 안 되는, 무조건 외워야 하는 암기과목 같은 세법 조항들도 있다. 주택담보대출(home equity loan, HELOC) 이자공제가 좋은 사례다. 흥부와 놀부는 대출금이 없는 집에서 각자 살고 있다고 치자. 오늘 10만 달러를 담보대출 받아서, 놀부는 그 집에 지하실을 새로 만드는데 썼고, 흥부는 신용카드 빚을 갚는데 썼다. 그러면 놀부와 흥부는 모두 이자부분에 대한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을까? 한 발만 더 들어가 보자. 만약 빌린 시점이 오늘이 아니라, 작년 12월 16일 이전이었다면? 그러면 이자공제 받는 것이 달라질까?

이런 차이들은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을 할 수 없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외우는 수밖에. 공부에도 이해와 암기가 병행되어야 하듯, 세무 회계도 그 둘의 적절한 조화가 최상의 결과를 가져다준다.

<문주한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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