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3년 칠인 순국회 조직. 순천지역 항일독립 운동 이끌어...‘치안유지법’위반, 평양형무소에 수감중 해방직후 출옥
▶ 북한 농산물 반출 소련군 열차 탈취작전도 감행...월남후 목회자의 길 걸으며 통일과 민족 위해 기도
조종희 목사. 1920년 평안남도 순천서 출생
상항노인선교회.구국감사교회 설립 사역...서당에서 한학공부 ‘신본주의’책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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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는 조종희 목사(98)는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자 목회자이다.
한국 국가보훈처의 안준범 주무관(예우정책과)과 이재섭 주무관(국립묘지 정책과)이 지난 6월 26일 생존 애국지사 위문의 일환으로 조종희 목사를 방문하고 돌아갔다. 국가보훈처의 애국지사 위문을 계기로 조종희 목사의 독립 활동과 통일을 위한 열정 및 그의 사역을 소개한다. 조종희 목사는 올해 98세로 대화가 쉽지 않아 차남인 조은석 목사(금문장로교회 담임)의 도움을 받아 그의 나라사랑과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종희 목사는 1920년 1월 3일 평안남도 순천군 선소면 연당리에서 출생했다. 20세 되던 해 김순종(후에 목사)의 전도를 받아 지역 교회에 나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23세 되던 1943년 칠인 순국회를 조직하여 순천 지역 국내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칠인순국회는 무장투쟁 단체로 당시 일제는 지역 청년들을 모아 단기 군사훈련 후에 최전방으로 파병했다. 칠인 순국회는 훈련병들을 수십 명 포섭했다.
조종희 목사는 내부의 밀고로 같은 해 5월 체포되어 평안남도 순천경찰서에서 9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재판을 거쳐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후 그는 이튿날 출옥했다. 조 목사는 후에 같은해 8월 18일에 자신의 사형집행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한반도와 자기를 살리기 위해 일본을 멸망시켰다고 믿었다. 그는 민족과 개인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민족을 이끌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이 이때 생겼다.
조종희 목사 수형 기록, 치안본부장이 1977년 발행 한것이다.
해방 이후 38선 이북 지역을 장악한 소련군이 북한의 농산물, 산업시설 등을 지속적으로 약탈, 소련으로 운반했다. 칠인 순국회는 소련군 열차 탈취작전을 감행했다. 조종희 목사는 주범으로 지목되어 체포명령이 떨어져 38선을 넘어왔다.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평양형무소에도 같이 수감되었던 동료 김순종과 김동협(후에 둘 다 목사 안수) 등과 함께 남하했다. 무더위가 온 땅에 기승을 부리던 1947년 여름 병석에 누운 조모는 물론 식구 누구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무지가 심문을 견디기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 목사는 월남 후 늘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며 힘썼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그 길이 가능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조종희 목사는 남산신학교에 입학, 신학수업과 함께 목회의 길을 걸었다. 목회자가 된 후 연백교회, 월천침례교회, 승기동교회, 모산감리교회 등에서 담임목사로 사역을 했다. 1964년에는 충남 아산시에 택민교회를 개척, 23년 동안 사역했다. 택민교회 사역 중 전국에 모두 22개 교회를 개척, 지원했다. 그리고 구화고등공민학교의 교목, 향토예비군 향목 등으로도 사역을 했다.
1978년 애국지사 결정 통지서
조종희 목사의 이와 같은 독립운동 사실은 1970년 10월 14일 충남 아산시 모산 건널목 사고로 인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모산에서 목회를 하던 조종희 목사를 참사 현장에서 현장을 지휘하러 나온 관할지역 경찰서 고위 간부가 발견했다.
먼저 조 목사를 알아 본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조종희 목사를 담당했던 간수였다. 조종희 목사는 출옥 직후 모여든 지지자들에게 연설했다. 얼마 후에 조종희 목사는 평양형무소를 방문했는데 그 간수가 친일 혐의로 수감된 것을 발견했다.
신임 형무소장을 만나 그의 죄과가 상대적으로 가볍다고 말했다. 그의 석방에 서명했다. 오히려 더 큰 범죄자들이 대부분 풀려난 상황을 개탄했다. 그런데 조종희 목사와 그 간수가 모산에서 26년만에 재회한 것이다. 그 경찰 간부는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수년 후 일본은 당시 법원의 재판기록을 보냈다. 시인 윤동주의 죄목과 똑같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정부는 1978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었다.
1983년 받은 애국지사 원호증서와 1990년 받은 건국훈장 애족장
조종희 목사는 처남 김윤규 장로 가족의 초청으로 식구들과 함께 198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민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 후 1990년 상항노인선교회(현재 상록선교회)를 설립했다. 노인선교회는 매주 베이지역의 목회자들을 초빙하여 예배를 드렸으며 때론 타 지역 목회자도 강단에 세웠다. 예배 후에는 식사와 친교를 나누웠으며 인도 등 해외 선교사들을 집중 후원했다.
1996년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가 파월 스트릿 소재 역사적인 건물을 매각한 후, 미주한인 기독교 역사를 새로 여는 각오로 구국감사교회를 개척했다. 그해 노인선교회 리더십을 접은 후 한선수 목사에게 인계하고 금문교회 출석도 중단했다. 병환으로 쓰러지던 2016년 5월까지 21년 동안 구국감사교회에서 매주 설교를 했다. 조종희 목사는 하나님께서 한반도에 주신 해방을 감사하고, 분단극복 및 평화통일의 길에서 그 감사를 이어가야 한다는 점이 일관된 설교 주제였다. “해방의 종소리”가 그가 전한 마지막 설교의 제목이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오래 공부한 조 목사는 한문에 능통하다. 운율 있는 시작법으로 메시지를 압축 전달하는 독특한 필법을 개발했다. 444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문집 <신본주의>는 아마존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조종희 목사 문집 ‘신본주의’ 책자 표지
노환은 그 힘차던 목소리를 앗아갔다. 그러나 누구라도 집중하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지난 6월 26일 대한민국 보훈처에서 방문한 두 명의 주무관에게 “한반도의 통일과 대한민국이 세계에 뻗어나가는 나라가 되게 함께 기도해 주시오”라고 전했다.
조종희 목사의 아내 김필규 사모는 2007년 소천했다. 여섯 명의 자녀들이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장녀는 강은숙 전도사로 금문교회 전도사다. 장남은 조은택 장로로 샌프란시스코 재팬타운에서 서울가든을 운영하고 있다.
차남 조은석 목사는 1994년에 금문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목회를 해오고 있다. 삼남은 조은삼 집사로 로데오에서 미국 식당을 운영하며 사남은 조은필 집사로 시내 일식당 가부또를 운영한다. 막내는 조윤택 집사로 LA에서 교회 지휘자다. 아홉 명의 손자, 손녀들 중에 외손자 강석윤과 큰손자 명인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조종희 목사는 약해진 목소리와 무릎 관절염 외에 성인병 없이 건강하다. 날마다 예배와 기도로 살아가는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 성경말씀을 따라 한반도가 평화롭게 통일되어 세계사에 빛날 것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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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