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아버님 전상서 -아버지 날에-

2018-06-13 (수) 김해종/목사·전 미연합감리교회 감독
크게 작게

▶ 독자·문예

아버님, 이 불초자식 아버님께 편지를 올리는 것은 처음입니다. 아버님은 늘 제 곁에 계셨으니까요…열다섯 살 때까지. 아버님이 제 곁을 떠나신 것은 6.25 한국 전쟁때였지요. 1950년 9월 27일, 그날은 서울이 탈환되는 날이었지요.

삼개월 전에, 김일성은 무모하게도,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하겠다고 전쟁을 일으켰지요.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사흘만에 서울에 쳐들어 왔을 때, 아버님. 얼마나 놀라셨어요? 그때 아버님은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밑에서 경제계획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계셨지요.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아버님은 생명의 위험 속에 숨어 사셨고 우리 집에는 완장을 찬 사람들이 일본도와 총을 들고 다섯 번씩이나 가택 수색을 했지요. 정말 무서웠어요.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는 바뀌었으나 서울에는 많은 폭격이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장거리 포탄이 날아왔지요. 마지막 며칠은, 밤이면 방공호에서 모기와 싸
우며 긴 밤을 지내야 했고 아버님은 병들어, 의사도 약도 없이, 고열로 인사불성이셨지요. 그러나 돌아가시던 날 아침, 미군이 들어 왔다는 소식을 제가 큰소리로 전하자, 눈을 번쩍뜨시고 “태극기를 내다 걸어라!” 한마디 하시고는 다시 코마 상태로 들어가셔 그날 밤 10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버님, 그날로 소년 가장이 된 저는 아버님께 마음속으로 약속 했지요. “아버지, 어머님하고 동생들은 제가 돌볼께요, 염려 마세요”라고… 다음해 1월4일에는 중공군을 피
해 꽁꽁 언 한강을 얼음 위로 건너 정처 없이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캐시미어 외투를 입고 손수레를 끌었지요. 두 어린 여동생들은 위에 태우고 어머니와 동생은 걸어서 백리 길을 갔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 후 2년동안 저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여 돈을 벌었고 미군 군목의 통역이 되어 설교하러 다니다가 하나님 부름 받아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10년 후, 우리 가족은 미국에 와 우리 네 형제들은 다 목사가 되었답니다. 어머님도 우리와 함께 미국에서 신앙생활 하시며 행복하게 사시다 돌아가셔,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공원묘지에 모셨고 아버님도 모셔왔지요.

아버님, 이달 6월 25일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지 68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 그 손자가 미국 트럼프 대통령하고 만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했고 원자탄도 없앤다며 한반도의 평화를 약속 했답니다.

저는 아버님이 남기신‘ 나의 신념’이라는 글, 너무 좋아해요. 여기에 소개해도 되지요?
“나의 신념: 정의는 난세 중에서도 행하여진다/ 정의로운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는다/ 정의를 행하고도 사람들의 오해와 미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변명이란 무용지물이다. (김복길).

<김해종/목사·전 미연합감리교회 감독>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