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사 경내에서 참선중인 대만 스님 [사진제공-삼보사]
이게 뭘까...이게 뭘까...이게 뭘까...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아니었다. 진학을 못한 열등감도 아니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던 10대 후반에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손00 군을 사로잡은 것은, 머리에 있는지 가슴에 있는지 모를 그의 ‘생각 주머니’를 꽉 채운 것은 ‘뭔지 모를 이것’이었다. 목 안의 생선가시 같은 이것을 그는 삼키든 뱉어내든 해야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청화 스님이란 큰 도인이 지금...
그는 솔깃했다. 1975년 봄 신체검사를 받으러 고향(해남)에 내려간 김에 그는 대흥사 진불암을 찾았다. 그렇다고 출가생각은 아니었다. 물음표를 풀고 싶을 뿐이었다. 암자 둘레 축대 겸 돌담 옆에서 꽤 오래 서성였다. 문이 열렸다. 스님이 나왔다. 그는 설렜다. 와락 달려가 묻고 싶었다. 발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님은 곁눈 한번 주지 않고 해우소에 들렀다가 바로 토굴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어디서나 좀체 쫄지 않는 그였지만 정작 벼르고 벼른 순간에 얼어버렸다. 노크는커녕 조심스런 인기척을 낼 용기조차 사라졌다. 정적에 묻힌 암자를 뒤로 하고 그는 돌아섰다.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갔다. 이마에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렸다.
서울살이 그리고 군대생활, 정신없이 지나가는 5년 남짓 기간에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꼬였다. 그럴 때면 청화 스님 자태가 떠올랐다. 몇 발치 앞에서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다.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간 중학교 동창생 셋의 얼굴이 번갈아 어른거리기도 했다. 제대 후 그는 다시 스님을 찾았다. 또 허탕을 쳤다.
1986년 가을, 서른 살이 된 그는 물어물어 스님의 거처를 알아냈다. 곡성 태안사였다. 찾아갔다. 삼수 끝에 마주 앉은 그에게 스님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아니 이렇게 미남이 왜...”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3년 안에 결판을 내고 절을 떠난다(환속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3년은 5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20년이 됐다. 어느덧 30년 하고도 두어해가 더 흘렀다. 60줄에 들어선 그는 아직 절간에 있다. 이제 절간을 떠날 생각도 없다. 카멜 삼보사 주지 대만 스님 얘기다. 올해 3월로 만 7년이 된 그의 삼보사행도 애당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큰스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 성륜사(청화 스님 문중의 본사)가 어수선했어요. 주지를 맡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등떠밀려 맡았어요.” 어쨌든 성륜사는 본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청화 스님 부도전 회향까지 마치고 그는 물러났다. “(청화) 큰스님 흉내라도 내고 싶어서” 그는 번다한 한국사찰을 마다하고 미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남가주) 금강선원을 봤어요. 법당 바로 아래 주방이 있어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음식 냄새가 올라오고 해서” 그는 단념했다. 삼보사로 방향을 틀었다.
2011년 3월 초, 삼보사 주지로 부임한 그는 얼마 뒤 3년결사(천일기도)에 들어갔다. 포행을 위한 자갈길을 만드는 등 사이사이 ‘작은 불사’도 병행했다. 세상만사 대개 그렇듯이 뜻밖의 장애가 생겼다. 여우털만큼의 미세한 차이가 종국에는 하늘땅만큼의 거대한 차이를 초래한다던가(毫釐有差 天地懸隔/호리유차 천지현격). 작은 불사를 둘러싼 스님과 몇몇 신도간 작은 견해차가 불씨였다. 스님은 1980년대 후반 의문의 화재로 사라진 법당 터에 ‘막사법당’을 만들어 새 수행터로 삼으려 했다. 몇몇 신도들은 예산 등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있을 수 있는 견해차가 걷잡을 수 없는 갈등으로 번졌다. 별 말이 다 돌다 재작년 12월 동지법회를 계기로 갈등이 폭발했다. 이른바 삼보사 사태다. 아니, 삼보사에서 생긴 일이다. 출가자 중심의 한국식 불교문화와 재가자 중심의 미국식 불교문화가 혼재된 동포불교에서 심심찮게 빚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부처님 도량다운 해결을 바라는 뜻에서 사태의 전말을 시시콜콜 옮기지는 않는다.
그후, 스님은 사과했다. 신도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성륜재단은 당초 양시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며 자체해결을 종용했다. 이렇다할 성과가 없자 후임주지를 낙점했으나 그 스님의 건강문제로 사실상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삼보사 전 주지 중 한명이 대타로 거론된다는 소문이 간간이 나돌았다. 그리고는 답보상태다.
찬바람이 몹시 불던 지난 2월 24일(토) 낮에 밀피타스의 한 음식점에서 대만 스님을 만났다. 연말부터 수차례 전화통화와 메시지교환 끝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대화는 자리를 옮겨가며 4시간 이상 이어졌다. 사태관련 일문일답 인터뷰는 아니었다. 사안의 민감성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딱딱한 인터뷰 같은 걸 즐기지 않는 스님의 스타일을 존중해 두서없는 환담 속에 드문드문 속내를 짚어볼 수밖에 없었다.
뜻밖에도 혹은 당연히도, 스님은 신도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내 업장이 두터워서”라고 자신의 허물로 돌리며 “(삼보사)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나 말고 부처님을 보고 (다시 오라)” 손짓했다. 작년 10월에 개원한 삼보사 인근 우리절에 대해서도 운월 스님에 대해서도 그곳에 다니는 신도들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널리 알려지면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도움이 될 법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뭘 그런 걸” 하면서 너털웃음으로 넘겨버리곤 했다. 재단에는 단호했다. 현지사정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무슨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그럴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고 “재단에 경고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내년 3월이면 대만 스님의 2차 주지임기 만료다. 그러나 스님은 적어도 당분간 삼보사를 떠날 생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좌탈입망의 희열을 증명하기를 발원할 뿐”이라며 “이것저것 좀 정리가 되면 (3년결사 천일기도를) 다시 하겠다”는 계획을 풀었다.
분위기를 바꿔 10대 후반에 품었던 “이게 뭘까” 그 의문이 무엇인지 그게 풀렸는지 물었다. 스님은 즉답을 피했다. “그 시절에 화두 이런 게 유행했잖아요. 그런데 그걸 말하자면 따로 또 시간을 잡아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는 웃었다. 그 끝에 넌지시 자신감 내지 기대감을 내비쳤다. 다짐 같기도 했다. “탁 붙들고 한 3년 더 파고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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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