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됐든 그것 자체가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질은 다 있다. 인간에게도 이미 주어진 본질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인 자연에게도 그게 있다. 산의 본질, 바다의 본질, 공기의 본질, 나무의 본질, 짐승의 본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그 자체의 내재적 본질은 있게 마련이다.
가장 완벽한 세상은 거기에 존재하는 그 모든 개체들이 자신의 본질에 충실할 때 온다. 그 본질들은 그런 점에서 ‘주어진’ 것이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 즉, 창조주가 그 개체들에게 부여한 사명, 그게 바로 그들 각자의 본질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창조적 사명을 잘 감당해준다면 이 세상은 정말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한 현상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수동적 위치를 차지하는 자연은 이에 결코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들의 본질을 묵묵히 잘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을 다스릴 위임명령을 부여받은 인간들이 더 물의를 일으킨다. 자신의 본질을 잘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지키기 싫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아닌가? 침묵과 순종의 자연은 자리를 꼿꼿이 잘 지키는데, 그들을 다스릴 권한을 지닌, 소위 ‘지혜롭다는’ 인간들은 그 자리서 한참 벗어나있다. 성경은 인간들의 이런 행태를 놓고 ‘죄’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중요한 게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자기 본연의 위치를 벗어나 일탈을 습관화하는 인간들을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놓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일탈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말이다. 이러니, 기독교 구원이 ‘은혜’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로서 나는 이 중대한 사건을 매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설명 작업을 ‘설교’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토록 소중한 목회자의 설교사역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아주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떠버리면 “설교하고 있네~” 하며 비아냥댄다. 심지어, 설교를 중요한 일로 관행적으로나마 이해해오고 있던 교회서마저도 설교는 이제 점점 더 성가신 일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목회자로서 이 사역의 중대성을 결코 소홀히 다루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이 사건의 중심을 차지하는 바로 ‘그 내용’ 때문이다. 목회자의 설교가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그 메시지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설교자 자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설교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대사가 외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파견한 자국에게나 파견 가 있는 외국에게나 다 중요한 인물이다. 왜인가? 파견한 자국 왕의 메시지가 파견된 그 나라에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로 인해 양국 의견이 잘 조절되면, 그때부터 양국 사이엔 활발한 외교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이처럼 대사에게 자국의 메시지는 그의 존재적 본질의 모든 것이다. 설교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이와 같다.
이 사실을 깨닫고 있는 요즘, 난 이제야 설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것 같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인 나를 설교자로 강단에 세우신 이유는 오직 이것 하나뿐이라는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일이다. 그 소식의 위대함, 영광스러움, 위엄 있음, 감사함, 넘침, 감격스러움, 힘 있음 등이다. 설교 안에 이 말 외에 굳이 다른 게 더 필요할까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날 설교강단에서 굳이 안 해도 될 나의 장광설만 과도히 늘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후회스럽다. 성경 어딜 봐도 그리스도의 은혜만 돋보이는데, 그 은혜가 나를 늘 힘나게 한다. 이 파워는 내게만 전달되는 게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특히 자신의 본연의 위치에서 한참 벗어난 이 시대의 아픈(사실 아픈 줄도 모르고 있는) 영혼들에게도 전달되는 능력이다. 그래서도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주어진 기회에 강단에서 이 말만 해도 부족한 시간들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린도전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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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