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딸 친구가 결혼했다. 인생에서 가장 싱싱하고 완벽하다는 이십대의 딱 중간나이에. 친구와 딸은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 20년 전 딸이 다섯 살이었을 때 우린 동부 볼티모어에서 차를 끌고 서부 이 지역으로 이사 왔다.
부임했던 당시 그 교회 사이즈가 그리 크지 않아 아이들도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비슷한 또래였던 딸과 친구는 늘 붙어 다녔다. 그 우정은 지금까지 이어져, 이 지역에서 직장생활도 같이, 교회생활도 같이 하며 서로의 우정을 지속해왔다. 그러다가 친구가 먼저 결혼한 것이다.
딸 친구가 남편으로 맞이한 남자 역시 내가 목회하던 그 교회에서 같이 자랐다. 그러니 양가 부모도 내가 잘 알고 있는 옛 교회 교인들이다. 배우자 만나기 힘든 이 미국 땅에서 지들 알아서 잘 만나 결혼해주니 부모인 그들만이 아니라 나까지도 정말 기뻤던 것이다.
한편 부러운 마음도 있었다. 딸도 메이드가 아닌 신부로서 저 자리에 빨리 서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이었다. 부모에게 늘 힘을 주는 비타민 같이 소중하고 예쁜 딸이기에 내 옆에 꼭 끼고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는 딸 어렸을 때부터 가능한 한 빨리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라는 이른 재촉을 해왔기에 이 장면이 아니 부러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부러움은 매일매일 나의 개인적인 기도 속에서도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딸의 배우자 만남을 위한 기도다. 이 기도를 들으실 하나님께서 때가 찰 때 꼭 응답하시리라 믿는다.
친구 결혼식에는 다른 친구들도 많이 왔다.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 청년들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내가 잘 아는 아이들이다. 딸애가 다섯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그 친구들도 다 그 나이또래들이다.
나로서는 그들 대부분을 최소한 15년 전에 보고 이번에 처음 본 셈이다. 다들 몰라보리만치 의젓하게 잘 커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옛 교우들끼리 서로 맞장구쳤다. 이런 감사와 자조가 뒤엉킨 말들과 함께. 세상에 애들이 이렇게 다 커버렸네요!, 그 애들이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정말 놀랍지 않아요?, 이젠 우리도 많이 늙었나 봐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와 이런 얘기를 나눴다. 먼저 우리의 본연의 모습부터 제대로 보자는 얘기였다. 우리는 이제 주인공이 아니야, 걔들이 주인공이야,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직도 주인공인 줄 착각하며 애들한테 여전히 행세하려든단 말이지, 아마 애들이 속으로 비웃을 걸?, 그러니 이럴 땐 조용히 물러나는 게 지혜고 상책인 거야.
어느 작가가 쓴 한 소설 중 이런 비슷한 표현을 본 기억이 있다. “유서란 저승에서도 힘을 발휘하고픈 욕망의 표현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세력 발휘의 본능을 갖고 있다. 요사이 자주 쓰는 말로는 인간은 누구에게든지 ‘갑질’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게 생각보다 맘대로 잘 안 된다.
가장 안타까운 부모상은 부모로서 자녀들 미래의 모든 코너에 지켜 서서 그들의 앞길을 관할하려는 모습이다. 영향력이란 그것이 자연스러울 때 가장 좋다. 아이러니 아닌가? 나도 내게 영향을 주고 싶어 안달하는 내 주변 그 사람한테서는 전혀 영향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반면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함으로써 스스로를 잘 관리하는 사람한테는 영향을 받고 싶어 한다. 존경은 존경받을 그 사람이 상대에게 요구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존경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그렇게 주어지는 존경이 진짜 존경이다.
부모자식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자녀를 달달 볶지 않도록 하라. 저들도 이미 사회에서 충분히 어른이다. 이민목회 하면서 발견한 사실이다. 2세들은 자기들이 교회에서 애 취급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이게 비단 교회에서만의 문제일까? 집에서도 잘해야 한다.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지혜롭고 겸손한 부모가 되도록 하자. 난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합니다, 이런 소리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낳아 키운 자식들에게 이 정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인생 정말 잘 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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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