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만이 최종적 권위.교인 다수결로 정하는 교회 정치확립
▶ 영국보다 미국땅서 부흥,찰스 스펄전 같은 교회 지도자 배출
찰스 스펄전 목사가 목회를 했던 메트로 폴리탄 터버너클
7세기 경에 영국을 통일했던 오스위(Oswy) 왕은 켈트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서로 충돌하는 것을 보고 664년 휘트비(Whitby) 종교회의를 통해 로마가톨릭교회를 영국의 국교로 삼았다. 이후 1534년 헨리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기까지 영국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에 존속되어 있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바람은 섬나라 영국 땅에도 불어왔고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1533-1603)은 중도노선을 취하여 대륙의 칼빈주의적인 개혁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를 절충시켜 영국민들로 영적인 안정을 취하게 하려 했다. 여왕은 자기의 종교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한편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재임하고 있을 당시에 존 낙스(John Knox)에 의한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두어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교가 됐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제임스 6세는 제임스 1세(King JamesⅠ, 1603-1625)라는 이름으로 영국 왕으로 부임했다.
영국 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영국국교회 지도자들과 손을 잡고 여타의 분파들에 대해 핍박을 가하였다. 그 당시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두 개의 거대한 목소리가 있었다. 하나는 영국국교회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개혁을 부르짖는 온건파(청교도들)였고, 다른 하나는 영국국교회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거기로부터 분리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격파(분리주의자들)였다. 침례교운동은 17세기 초 이러한 영국 분리주의자들로부터 태동되었다.
영국에 첫 침례교회가 시작된 스피탈 필드 마켓.
영국침례교회는 서로 다른 기원에 의해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로 발전했다. 일반침례교회(General Baptists)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알미니안주의적 보편속죄설을 기초로 하는 교회이고, 특수침례교회(Particular Baptists)는 그리스도의 속량은 오직 선택받은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칼빈주의적 제한속죄설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이다.
일반침례교회는 존 스마이드(John Smyth) 목사가 시무하던 분리주의 교회인 게인즈보로교회가 영국국교회의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집단 이주를 하면서 네덜란드의 아나벱티스트들과 접촉하게 되고 영향을 받아 “신자의 뱁티즘” 행습을 따라 1609년 최초의 침례교회로 세워졌다. 그러나 존 스마이드가 교회를 해체하고 메노나이트 교회와 합치려 할 때에 이를 반대한 토마스 헬위즈(Thomas Helwys)가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와 함께 1612년경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런던브리지(London Bridge) 북쪽인 스피탈필드(Spitalfield)에서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 모임이 역사적으로 영국에서의 첫 번째 침례교회가 됐다.
오늘날의 Spitalfields Market과 그 주변 지역에서 일반침례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또 다른 침례교회인 특수침례교회는 온건한 분리주의의 형태로 발전했다. 1616년 헨리 제이콥(Henry Jacob)이 이끄는 분리주의자들이 칼빈주의적 구원론인 제한속죄설, 또는 특수속죄설을 믿으며 런던브리지 남쪽 써덕(Southwark)지역에 JLJ교회로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유아세례를 반대하던 존 스필즈버리(John Spilsbury)와 성도들이 그 교회를 나와 1638년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최초의 칼빈주의 침례교회의 효시였고, 그들의 ‘제한속죄설’로 말미암아 ‘특수침례교’라고 호칭되었다.
이처럼 영국의 침례교회는 런던 브리지를 사이에 두고 남과북에서 발전했다. 필자는 지난 6월3일 저녁에 런던브리지를 남북으로 걸어 영국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의 근원지를 방문하고자 마음먹었으나 다음날인 주일에 스펄전이 목회했던 교회에서 예배드릴 생각에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그날 밤 10시경에 런던 브리지와 버러 마켓(Borough Market)에서 “이것은 알라를 위한 것이다”라고 외치는 범인들에 의해 차량 추돌과 흉기를 이용한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경찰에게 사살된 범인 3명을 포함하여 시민 6명, 등 총 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그 후 런던브리지는 이틀간 폐쇄되었다. 두어 시간 차이로 필자도 희생자가 될 뻔 하였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모면하였다. 희생자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필자의 안식월 연구와 건강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족들과 교회 중보기도팀을 비롯한 성도들의 얼굴이 떠올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영국 침례교 발전의 중심인 런던 브릿지에 서있는 필자 고상환 목사,
침례교회는 영국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영국에서는 영국국교회(Anglican & Episcopal Church)가 기득권을 향유했기 때문에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국 땅에서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게 됐다.
영국침례교는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현대선교의 아버지 윌리엄캐리, 불세출의 설교가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목사와 같은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런던브리지 남쪽 Elephant and Castle 지하철역 근처에는 찰스 스펄전 목사가 목회했던 당시로는 세계최대의 교회였던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Metropolitan Tabernacle, 주소: Elephant & Castle, London, SE1 6SD ) 침례교회가 있다. 외형이 대영박물관과 유사한 이 교회는 찰스 스펄전 목사가 1861년에 세운 교회로 19세기 런던 대부흥을 이끌던 개혁주의 부흥의 본거지이다.
침례교회 영성의 특징은 교회개혁의 부족한 부분을 고려하여 국가권력과는 무관했던 초대교회 혹은 신약성서적 교회를 충분히 회복하려한 점이다. 이런 영성으로 말미암아 다른 교파들이나 교단들과 구별되는 독특함을 갖게 됐다. 세속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한 교회,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에게만 침례를 베풀고 거듭난 신자들로 회원을 삼는 교회 전통을 갖게 된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예배시간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동의하면서도 신조를 고백하지 않는 이유도 오직 성경 만을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는 그들의 영성 때문이다.
이런 영성을 알면 침례교회가 주요 안건들마다 교인들 모두가 참여하여 다수결로 결정하는 교회정치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침례교회는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으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민주적 회중주의” 혹은 “신적인 민주주의”를 갖게 되었다.
이는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교인들의 결정이라면 하나님께서도 그들 가운데 함께하실 것이라는 확신에서 ‘신적인 민주주의’를 하게되었다.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산 그들의 영성을 오늘날 성도들은 본받아야 한다.
영국에 첫 침례교회가 섰던 스피탈 필드 마켓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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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환 목사 (세계선교침례교회 담임, 게이트웨이신대원 초빙 교수)>